Peter Pan in NeverLand

만화 - 엠마 1-10 [모리 카오루] 본문

감상과 비평/책

만화 - 엠마 1-10 [모리 카오루]

☜피터팬☞ 2009. 3. 23. 02:32
반응형

19세기의 영국.
산업혁명으로 부루주아라는 신흥 계급이 생겨났고,
경제의 발달로 변화와 개혁이 물결치던 시기.
하지만 여전히 낡은 전통과 사회 계급이 존재하던 때.
부루주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존스가의 윌리엄과
신분계층에서 가장 낮은 메이드인 엠마의 사랑이야기.

보통 프롤로그를 적을 때 나는 모든 이야기를 다 적기보다는
어느 정도 배경 설명만 하는 선에서 그치는 편이다.
내가 리뷰를 쓰는 작품을 이미 본 사람이라면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고,
만약 아직 못 본 사람이라면
너무 많은 설명으로 스포일을 하고싶지 않아서다.
(물론 글을 다 읽으면 스포일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런데 이 만화의 경우...
만약 이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내 프롤로그만 보고
흔하고 뻔하며 고답적인데다가 교과서적인 내용을 상상한다면,
나는 당당히 외쳐주겠다.
"Exactly!"

부자집 도련님과 가난한 메이드의 사랑 이야기.
도련님은 우유부단하고 느긋해 어쩌면 약간 나사가 빠진 듯하지만,
막상 마음먹고 일을 시작하면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 성격의 소유자.
여자 주인공인 메이드에 대해 설명하자면,
얼굴이 이뻐서 여기저기서 대쉬가 들어오며
성격은 조용하고 차분한 여성스러운 스타일에 머리도 좋고 메이드이면서도 나름 교육을 받았다.
주인공 설정부터 뻔하다.
내용이라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분의 차이에 따른 집안의 반대.
당연히 등장하는 신분좋은 아름다운, 더군다나 착하기까지 한 아가씨.
사랑만으로 넘기에는 참으로 높게만 느껴지는 주변의 여건과 차가운 시선들.
그리고 확인되는 두 사람의 사랑.
당신이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흔하디 흔한 설정은 여기에 다 들어있다.
와우~ 이 정도면 윌리엄 쉐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견될 정도로 고전적이다.-ㅂ-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고전은 나의 애독서인 걸.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남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재미있다. 재미있는 걸 어쩌겠냔 말이다.

이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없이 느긋함의 미학을 이야기하겠다.
느긋함의 미학은 연출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컷과 컷은 튀는 장면 없이 부분부분을 세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덕분에 많은 컷들이 배경을 담고 있고, 독자는 매 컷마다 풍부한 그림을 만나게 된다.
(배경이 없는 그림과 있는 그림은 그림의 깊이나 표현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사람이 많은 장면을 그리기 좋아하는 작가들 덕분에 이런 풍부함은 배가 된다.
사람들이 많은 도서관의 조용한 분위기와 왁자지껄한 하인들의 파티장, 그리고 우아한 분위기의 사교계 파티장 등.
이런 장면들은 작가의 뛰어난 연출력과 댓생력에 힘입어 독자에게 풍부함의 다양함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그것은 책을 다시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그림은 매 번 우리의 경솔함을 일깨운다.)
느긋함과 풍부함은 자칫 이야기의 속도감과 맞지 않으면 때때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빠른 전개를 요구하는 만화에서 독자는 하나의 컷에 붙잡혀 있기 보다는 다음 컷을 보고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도 느긋하고 이야기의 템포도 느긋하기 때문에 우리는 컷 속의 재미들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 우리는 이야기의 마지막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정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꾸며주는 소품들을 둘러볼 수 있다.
수많은 액자가 놓여있는 난로라던가, 장식이 화려한 장식품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서재, 영국의 거리들을.

게다가 주인공들의 성격이 최근의 트랜드와는 다르게 너무나 평범해서
우리를 확 사로잡는다기보다는 다른 등장인물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점도 이런 느긋함과 맞물린다.
(때때로 다른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주인공의 성격을 압도할 정도다.-ㅂ-;)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변인들로 보일 수 있다는 의미랄까.
그것은 매 에피소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 페이지짜리 짧은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한 페이지짜리 짧은 이야기는 주로 주변 인물들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주변인물이라는 것이 정말 완벽한 엑스트라인 경우도 종종있다.
인물의 비중은 전혀 없고, 이야기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에피소드는 이 만화의 또다른 매력이다.
주인공들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만화의 세계에는 살고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대단원을 장식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거의 3권을 채워넣은 것은 이러한 매력의 절정이다.
어딘가를 갈 때 목적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가는 도중에 만나는 주변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느긋함의 미학이다.
숨가쁘게 전개되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짧은 휴식이 아닌,
처음부터 긴 호흡을 갖고 천천히 길을 걸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려는 마음가짐.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당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하기 위해 쏟은 작가의 노력을 바탕으로 한 느긋함의 미학은
어찌보면 흔하고 뻔해서 유치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현대적인 그 어떤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 당시의 감성과 느낌을 기대한다.
물론 고전을 배경으로 해서 현대적인 느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고,
현대를 배경으로 해서 고전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퓨전에서 오는 신선함이지 고전에서 오는 익숙한 편안함과는 다른 것이다.
요컨데, 고전에서는 고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감상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만화는 현대에 만들어졌는데도 마치 고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바로 그것이 이 흔하고 뻔한 로맨스 이야기를 거부감없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이유다.
고전을 읽으면서 고전이 너무 뻔해서 재미없다는 사람은 고전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19세기에 유행하던 어떤 로맨스 소설을 현대의 어떤 작가가 만화로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현대적인 감성이 아니라 그 당시의 감성 그대로 말이지.^^
(앗, 그러고보니 이 만화엔 전형적인 악인 캐릭터는 없네..-ㅅ-; 이거 미스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감성 역시 현대적이기 보다는 그 당시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더군다나 사랑 이야기는 아무리 달라지더라도 그 안에 관통하는 그 어떤 부분은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일맥상통함을 가장 극명하고 꾸밈없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전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철저한 준비와 현대적이지 않은 느긋한 템포의 이야기와 연출.
그것은 어쩌면 윌리엄과 엠마의 사랑 그 자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스파크가 일듯이 파바박하고 튀지는 않았지만,
분명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가슴에 품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들은 조심스러웠고 그들이 사랑을 이루는 템포는 느긋했으며,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두 사람이 사랑을 위해 변해가는 과정 역시 순식간이 아닌 천천히 느릿하게 이루어졌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 시대, 19세기의 매력인 지도 모른다.
시속 100km가 넘는 자동차의 시대가 아니라 마차가 활보하는 시대의 매력.
마음이 내키면 언제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핸드폰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한자한자 눌러 써 며칠을 기다려야만 하는 편지 시대의 매력.
필요한 것들이 순식간에 파악되어 결정되는 시대가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해나가며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시대의 매력.

아아... 그 매력은 사랑, 그 자체의 매력이다.

이 만화는 사랑과 닮아있다.
오래도록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추구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오랜 사랑은 느긋함을 지녀야하고 풍부하고 다양해야한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윌리엄과 엠마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흔하고 뻔하고 유치하다고 해도 좋을 그런 사랑 이야기다.
나는 이런 사랑 이야기가 좋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들이 나와서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좋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얽어내는 이야기가 좋다.
전통적인 캐릭터들의 사랑은 전통적인 사랑의 이미지처럼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라고,
전통적인 동화 속 마무리 말처럼,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 짓고 싶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