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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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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

☜피터팬☞ 2005. 4. 1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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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제 1부.
콘스탄티노플 함락.
지금에 와서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도시는
로마 시대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수도록 정해진 뒤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동로마로도 불리는 이 도시는 제국과 함께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는 1459년 5월 29일 함락되면서 그 이름과 함께 다른 도시로 변하고 만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는 위치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상당히 의미있는 도시였다.
이 도시의 위치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해있어 교역과 군사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변질과 멸망으로, 유럽의 모태라 불리는 로마의 역사를 잇는 제국의 수도였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최전선이기도 했다.
이 도시가 멸망할 무렵에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세력이 당시 교역으로 이름을 떨치던 제노바와 베네치아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 도시의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컸는 지 알 수 있다.
또한 비록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무의미하게 되어버렸지만, 당시 기독교 국가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원군을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지리적인 위치나 그 상징면에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던 이 도시.

이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아니 어쩌면 당시 이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내성벽과 외성벽으로 이루어진 이중의 성벽과 외성벽 바깥으로는 방책과 호까지 파여져있어서 난공불락이라고 불릴만 하였다.
1000년간의 역사 속에서 이 도시는 수없이 공격당하고 포위당했지만 십자군에 의한 공격을 빼고는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을만큼 견고함을 자랑했다.
이토록 튼튼한 도시를 노린 것은 투르크의 메메트 2세.
21세라는 젊은 술탄이 난공불락이라고 하는 이 도시를 노리기로 마음먹은 것이 술탄이 비단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에 심취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과 함께 이 도시의 전략적, 지리적, 경제적 이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메메트 2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복욕 또한 무시할 순 없겠지.

당시 비잔틴 제국은 극도록 쇠약해져있는 상태였고,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유럽과 비교해봤을 때 발전 또한 더디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투르크와는 우호협정까지 맺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투르크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그리 크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잔틴 제국이 불안해한 것은 속을 알 수 없는 메메트 2세라는 술탄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 불안은 곧 현실로 나타난다.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의도를 눈치채자마자 비잔틴 제국은 곧 유럽의 여러 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
하지만, 베네치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가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것은 각 국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이 그리 쉽게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도 한 몫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농성 50여일을 버티다 투르크에 함락되고 만다.

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은 전쟁사적으로도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이 전쟁은 공성전의 의미를 바꾸어버렸고, 성을 건축하는 방법 또한 바꾸어 버린다.
실제로 이 공방전에 투입된 투르크의 병사들은 16만에 달하고 방어에 임했던 비잔틴 측의 병사들이 만명이 안 되었지만,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결코 병사의 수가 아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병사의 수가 이 전쟁을 마무리짓게 만들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과거에도 병력차를 극복하고 농성전을 승리로 이끌었었고,
유럽이 늦장을 부릴만큼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기존의 공성전 양상으로는 쉽게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전의 공성전 양상은 많은 병력을 이용하여 성을 포위하고 그들이 항복할 때까지 버티거나,
성벽을 타고 많은 수의 병사를 투입하여 성벽을 제압하고 성문을 열거나 혹은 성문을 직접 공격하여 부수고 난 후, 백병전을 이용하여 성 내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오르기 힘든 성벽과 튼튼한 성문은 기존의 공성전에서 방어측이 가져야할 필수의 조건이었고 이런 점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그야말로 다른 어떤 성벽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성벽에 대항해서 투르크의 메메트 2세가 내놓은 것이 바로 헝가리의 기술자가 만든 대포였다.
대포의 무게만 600킬로그램이 넘었고, 이것을 이동시키려고 길을 새로 다지고 앞에서는 소가 뒤에서는 사람이 끌어당길 정도였다.
포가 발사될 때의 굉음은 20킬로미터까지 들렸고, 사정거리 또한 1.5킬로미터나 되었다.
결국 이 포는 견고하다고 이름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사정없이 부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공성전은 이제 이런 대포의 발명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엄청난 화력이 대포는 이제 유럽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한다.
대포의 화력이 바뀌자, 이 화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성벽의 축조법 또한 바뀌게 된다.
이전의 성벽이 높은 것을 위주로 제작되었다면, 이 후의 성벽들은 두꺼운 것을 중요시하게 된다.
또한 석궁과 총의 발명으로 점점 쇠퇴해가던 철갑옷을 두른 기사는 이제 완전히 물러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 도시의 함락은 투르크의 약진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기점으로 그 후 투르크는 오스만투르크에 이르기까지 동유럽과 발칸 반도, 아프리카와 서아시아까지 엄청난 영토와 힘을 가지게 된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멸망으로 서유럽은 그 때까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을 일이 없었던 이슬람 세력과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도시의 함락으로 인해 그 때까지 꽃피우던 기독교 문화는 이슬람 문화로 덧칠되었으며, 지금까지 이슬람 종교의 중요한 성지가 되어 버린다.
이 도시에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공존아닌 공존, 상처와 영광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적 외형에 이슬람적 내용물을 담고 있는.. 서구적이지도 이슬람적이지도 않은 분위기의 도시가 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첫번째인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화법으로 나는 15세기의 콘스탄트노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 번도 직접 가본 적도 없고, 직접 경험한 적도 없지만, 나는 작가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을 듣듯이 읽어갈 수 있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국가의 입장이 아닌, 그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 각각의 입장에서 이 거대한 도시의 함락 사건을 서술한 것은 내게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최대한 배제해 주었다.
내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승자와 패자, 그리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과 전쟁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힘없이 피해자들이었다.
그리고 역사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도도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그것은 또다시 새로운 그 무엇을 위한 하나의 바탕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어떤 문명의 멸망과 파괴가 단순한 쇠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멸망과 쇠퇴 속에서는 진정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과연 단순한 교훈 그 이상의 것은 없을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그 이후에 이스탄불이 되어버린 이 도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단순한 교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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