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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망량의 상자 [교고쿠 나츠히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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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망량의 상자 [교고쿠 나츠히코]

☜피터팬☞ 2008. 11. 2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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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친구인 가나코와 유리코.
둘은 한밤중에 호수에 가기로 하고 기차역에서 만난다.
그러나 가나코는 선로에 떨어져 기차에 치인다.
그 무렵, 무사시노에는 여자의 팔다리만 발견되는 엽기 사건이 발생하고.
세키구치, 교고쿠도는 '우부메의 여름'에서 만났던 기바 형사와 다시 만난다.

아마도 작가는 처음에 설정한 등장인물을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생각인 듯 하다.
다음 시리즈가 또 있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코난 도일의 '홈즈와 와트슨'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르'처럼
'우부메의 여름'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또 만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기회를 내가 과연 잡을 것인가하는 것은 확실히 고민되는 문제다.

지난 번 이야기에서 '세키구치'와 '교고쿠도'가 전면에 나섰던 것에 비해서,
이번 이야기에는 '기바 형사'의 비중이 훨씬 더 커졌다.
하지만 역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교고쿠도'의 몫이다.
게다가 지난 번 편에서 느꼈던 신선함도, 재미도 찾아보기 힘들다..-ㅅ-;


어릴적 읽었던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가를 좋아한 이유 중에 하나는,
어린이용으로 읽었기 때문인 지는 몰라도, 분명한 굵은 흐름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에 얽힌 이야기가 존재할 뿐,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여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스타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고,
단지 하나의 사건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번 우연히 접한 미국 드라마인 CSI에서도 보면, 하나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단서들은
때로 그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사건의 단서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 드라마는 복합적으로 진행되곤 했다.
이렇게 복합적인 사건의 발생은 아주 단순한 사건도 복잡하게 만들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이 약간만 삐끗해도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고 억지처럼 보이는 약점도 있다.
....그리고 '망량의 상자'는 이렇게 각각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ㅋ
덕분에 나는 소설 속에 등장한 장치들의 유기적인 연결과 유려한 이야기 흐름에 감탄하지 못하고
사건의 해결에 너무나 엄청난 비약 때문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허탈함을 느껴버렸다.

분명히 추리 소설에는 많은 부분, 사고의 비약처럼 보이는 부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각각의 단서들을 끼워맞추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정이 필요하고,
그 가정들 중에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끼워맞추기 위해서 과감한 상상은 필수다.
중요한 것은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과감한 상상이 사실은 충분히 근거있다는 것을 받쳐주는 소설의 숨겨진 단서와
그 단서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충분히 논리적 비약없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능력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너무나 우연히 서로 얽히고 섥혀있어서 현실감을 전혀 갖지 못했다.
여자에게 쑥맥인 '기바' 형사가 동경하던 여배우가 사건의 중심 인물이 되고,
그녀의 아버지는 '교고쿠도'와 전쟁 중에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사이였고,
사지 절단 사건의 범인과 '세키구치' 역시 모종의 관계가 있으면서
범인과 여배우의 주변 인물과의 또 다른 관계는 사건에 중요한 핵심이 되는 등...-ㅅ-;
단순히 등장인물의 면면만 살펴보더라도 이 소설에는 우연이 너무 많고 그 범주가 너무 넓다.


어쨌든, 이런 약점들은 잠시 잊고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고 싶다.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말이지.
이번 이야기는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보다 '요괴'나 초자연적인 부분에 집중하기 보다는
한 인간이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전작과 같은 퇴마 행위는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물론 신흥 종교인 '온바코'교와 종교의 목적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점쟁이나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삶에 안정을 얻고 행복을 얻는가가 그 중심에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고 점쟁이를 찾는 것은 불안정한 삶에 안정을 찾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이나
미래의 일을 알고 대비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자신에게 생긴 불행을 초자연적인 존재가 막아주고 행복을 되찾아준다는 믿음은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지고 싶어하며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무엇을 행복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현명한 질문이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무엇을 행복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이 무엇에 기대고 있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종교에 의지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며, 누군가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 수많은 방법 중에 어떤 방법이 최선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행복의 가치를 우리 내부에서 세운 기준이 아닌 외부에서 두고
능동적이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외부의 요구에 그저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금방 사라지게 되는 불안한 행복이다.
외부의 요구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붙잡기 위해 무언가 희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명백한 행복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는 일이 될 때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서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행복한가하는 것을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며, 행복 역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교고쿠도'는 이런 말을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라."

나는 저 말을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다만,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것,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나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 역시 완성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성실하게 우리의 삶에 임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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