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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윤대녕] 본문

감상과 비평/책

소설 -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윤대녕]

☜피터팬☞ 2006. 12. 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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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일하며 소설을 쓰는 영빈은
어느 날 밤, 호랑이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며 제주도로 향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잘 정리하지 못하겠다.
늪지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서서히 몰입되어,
끝나는 순간까지 나의 흥미를 잡고 있던 이 책의 스토리에 대해서,
간단한 몇 줄의 줄거리를 적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감상을 적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 이유다.
제목과 매치시켜서 줄거리를 적고 싶었지만...
결국 내 머리에서 나온 줄거리는 저 세줄이 끝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스토리의 부분부분이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줄거리를 제대로 적으려고 시도하면 책을 다시 봐야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서평이나 인터넷 등을 검색해서 나와있는 이 소설의 감상 등을 읽다보면,
이 책에 대해 바라보는 비슷한 관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386세대의 자기 고백과 극복이랄까.
격동의 세대를 살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소리치고 움직이던 사람들이 이제 사회의 주축이 되어
자신들이 만들어온 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극복. 혹은 화해.
작가 자신이 386세대이고 그의 소설 면면에 80~90년대의 모습이 뭍어나기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분명, 작가 자신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비슷한 느낌으로 남아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386세대도 아니고, 80, 90년대의 크고 굵직한 사건들을 그저 재미없는 뉴스의 한토막으로 받아들인 70년생(사실 80년생이라고 해야할까)인 내게는 좀 더 보편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 대한 용서, 혹은 과거로부터의 용서.
그리고 현재에 대한 인정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들.
언젠가 썼던 영화 '이도공간'의 리뷰에서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극복해야한다고.
나는 이 소설도 그렇게 읽혀졌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다며 학생 운동을 하다 무고한 친형을 프락치로 의심한 영빈이나,
어머니의 외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해연,
그리고 한국인 할머니를 둔 일본인 히데코, 자살한 사기사와 메구미도
모두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그토록 위태위태해보였을 것이다.
가슴 속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않아서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사는 사람들.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빙빙 돌고 있던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닮은 꼴의 쌍둥이들이었다.
가슴 속의 호랑이가 아프게 울부짖고 마음을 찢어놓아도 외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과거는 용서받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그대로 남아 밤마다 찾아와 그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영빈은 과감히 제주도로 간다.
과감히라는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쫓기듯이 내려갔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영빈은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며 제주도로, 바다로 간다.
그리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낚시를 한다.

바다라는 공간은 나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곳이다.
산이 가진 위용과 든든함과는 다른
넓고 넓은, 파도가 치고 비가 오더라도 결코 넘치치않는 바다의 안정감은 치료의 영역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곳에서 그는 호랑이를 만난다.
히데코의 호랑이도 거기 있었던 지도 모른다. 해연의 호랑이도 아마 거기 있었으리라.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랑이가 거기 있었다기보다는, 호랑이를 그곳에 풀어놓았던 것이리라.
자신의 호랑이는 결코 멀리 가지않고 항상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까.
그래서 치료받고 쉴 수 있는 바다에 호랑이를 풀어놓은 것이다.
그래, 그렇게 영빈은 호랑이를 만난다. 폭풍이 몰아치던 그 밤에 만난다.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호랑이를 품고 산다.
그것은 때때로 아무도 없는 밤이면 찾아와 슬픈 울음을, 혹은 무시무시한 울음을 포효하며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결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호랑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일이다.
영빈이 결코 호랑이를 죽이지 않고 그냥 놓아준 것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저 과거의 짐을 인정한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호랑이는 존재하되, 그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용서일 지도 모른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용서, 혹은 과거로부터의 용서. 어쩌면 화해.
그 어느 것이 되었던 간에 결코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정과 수용.
그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이며, 바탕이다.
영빈과 해연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화해를 이루고 나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런 결말은 작가 자신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것이 필연이냐 우연이냐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존재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생겨난다고 하여도,
존재한 이후에는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의 층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외면해서는 안 되고 외면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과거가 만들어놓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와 화해'인 듯 하다.
물론 모든 현재가 단순히 과거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화해와 용서가 현재를 구축하는 바탕이 되어야만 좀 더 진실되고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않을까.

P.S : 감상문을 아무리 적어도 작품의 느낌을 전달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작품 자체가 가진 감상이 감상문을 앞지른달까. 이 작품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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