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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 괴(怪 ~ayakashi~) [나카무라 겐지 외] 본문

감상과 비평/애니

연작 - 괴(怪 ~ayakashi~) [나카무라 겐지 외]

☜피터팬☞ 2007. 2. 12.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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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괴담을 얼마나 21세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 연작에 담긴 목표였다고 한다.
총 3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애니메이션 '괴(怪)-ayakashi'는 말 그대로 괴담이다.
각각의 작품은 감독, 각본, 작화까지 모두 다를 정도로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의 괴담이라는 것 정도.

첫 번째 이야기는 '요츠야 괴담'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恨'이다.
연적 때문에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한 여인의 한과
그녀의 죽음이 몰고오는 거대한 파장이 이 편의 주된 테마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고전 비극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비극적인 운명의 수레 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자신은 결국 나약한 인간임을 느끼면서 죽는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인간의 비참한 결말과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도덕적인 암시를 끌어내는
고전 비극의 주제는 이 작품 속에 잘 살아있다.
이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일본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보편적 비극의 플롯을 따라간다.
여담이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것을 이 작품을 보면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힘을 얻을 기회가 거의 불가능했던 여자들이 자신들의 원한을
저주를 내리거나 한을 품는 것으로 복수하려 했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충실하다. 이 작품의 마무리는 결국 여자의 '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작품이 주는 으스스함은 단지 비극이라는 점에서 끝나지 않는데,
작품의 에필로그로 작가인 츠루야 난보쿠가 나와서 요츠야 괴담에 얽힌 '괴담'을 이야기해준다.
이 작품은 내용의 무서움 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괴기스러움을 안겨준다는 것.
작품 속 작가도 자신이 이 작품을 쓰기는 하였지만, 정말 자신이 쓴 것인 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떤 힘이 자신을 빌어 이 작품을 만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계속 하는데,
이것은 이 이야기가 츠루야 난보쿠 자신이 이 작품을 손수 창작한 것이 아닌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를 자신이 각색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어떤 암시를 주고 있다.
이 '요츠야 괴담'은 가부키 극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작품과 관련된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즉 이 '요츠야 괴담'은 작품 자체로도 하나의 괴담을 만들고 있다.
따로 알게 된 정보로는 이 이야기 자체가 요츠야 지역의 유명한 괴담이라는 것이다.
극중 작가는 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 이야기에 담겨진 괴기스러운 힘을 바라는 이들의 바람이
괴담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만들어내서 이야기가 스스로 괴담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추측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힘에 의한 일종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덕분에 이 새로운 미스테리에 관심이 조금 생겨버렸다..^^;
(지금 상황이 이런 것에 매달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한번은 찾아보고 싶다.)

더불어 이런 유명한 이야기에 걸맞게 이 작품의 캐릭터 디자인을 한 사람 역시 엄청난 사람이다.
캐릭터 디자인은 그 이름도 유명한 '아마노 요시타카'이다.
혹시 누군지 모른다면 인터넷에 한 번 이름을 검색해보자.
당신이 게임이나 만화, 애니를 좋아한다면 이 사람의 그림을 한 번 이상은 보았을 것이다.
(파이날 판타지의 캐릭터 디자이너이며, 천사의 알 역시 이 사람이 원화를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개구리 왕눈이 일러스트도 이 사람이 했다고 하는군...'-'a)

두 번째 이야기는 천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가 사랑에 버림받은 여인의 한을 주제로 한다면,
이 이야기는 반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는 두 남녀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뭐,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나름의 사랑을 이루게 되니 비극이라고 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르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슬픈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망각신인 토미 히메와 매잡이 토쇼노스케의 이야기.
많은 전설 중에 등장하는 인간과 신에 대한 사랑 이야기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결코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 그대로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다.
신과 인간의 사랑은 흔히 비극적인 요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영역은 처음부터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사랑을 이뤘으니
작품의 분위기는 현대적이라고 평해도 되지않을까.
지금 생각난 궁금증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려고 했던 걸까?
신분의 차이를 벗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까?
아니면, 당시에도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걸까?
혹은 철없이 사랑에 빠져든 이들이 만들어낸 사랑의 비극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첫 번째 이야기와 세 번째 이야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에겐 좀 묻혀진 작품이 되어버렸다.

세 번째 이야기, 화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적인 그림체와 다양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당연 이 세 작품 중 백미이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오래된 물건이나 생물이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그러한 존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요괴가 된 고양이.
그러나 그냥 단순히 오래 존재하는 물건이나 생물은 없으며,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들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존재들의 이유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역으로 인간에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베풀어준다.
아니,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감출 수 있는 죄악이란 없으며, 끝끝내 보답받지 못하는 선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상황과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이 그런 존재들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느냐는 차이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며,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가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의 행동이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결말이 달라진다.
이 이야기 역시 첫 번째 이야기처럼 무척 고전적인 도덕을 끌어낸다.
전통 이야기라는 것에 컨셉을 맞추었기 때문인 지 전반적으로 이 연작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주제는
인간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도덕률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지.
진실이란 감추어질 수 없고, 인간은 자신이 행한 대로 보답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인간이 믿고 싶어하는 내용인 것 같다.
이 이야기도 따지고보면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한 주제라는 것.
그러나 그 인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는 전부 다 틀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연출이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다.

연출이 얼마나 작품을 살아나게 하는가에 대해 이 작품은 스스로 말을 한다.
예전에 '카우보이 비밥'을 보면서 TV 시리즈의 퀄리티를 극장판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만화 역시 극장판 수준의 연출이라고 해도 전혀 과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정적이고 느리게 진행되는 카메라의 흐름과 역시 정적이고 느린 인물들의 동선 속에서
갑작스런 컷의 변화와 순간적으로 빠른 움직임의 대비는 긴장감과 초조함을 증가시킨다.
왜곡이 심한 앵글과 인물을 화면 구도에서 약간식 벗어나게 배치하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과 기괴함을 느끼게 하면서 인물들 사이의 거리와 비밀을 의미한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일본의 전통적인 집 안에서만 진행되는데, 한 방을 여러 문으로 나눈 형태의 방이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의미로 방의 구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도 마치 일본의 방처럼 여러 영역이 있어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않은 부분은 문을 닫고 감추고 있지않은가.
정말 위급한 순간에만 사용하는 비밀의 방처럼 우리도 역시 가장 긴급한 순간에만 진실을 보이지않던가.
때로는 끝끝내 자신을 기만하며 진실을 왜곡하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특히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않은 그런 추잡하고 더러운 진실일 수록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의 방과도 같다. 아직 남겨진 문이 있을 지도 모르거든.
작품에서 말하고싶었던 인간의 추악함과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가는 작품 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잘 표현되고 있다.
그것 자체로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야.

이 만화는 형식적인 면에서 실험적인 정신으로 무장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뚝뚝 흘리고 있다.
화면 처리부터 마치 한지인 듯한 무늬를 넣어서 '나는 요즘 만화와는 틀리고 싶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왜 이런 아이디어를 먼저 사용하지 않았나하는 안타까움마저 든다.
화면 처리를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동양적인 느낌을 물씬 줄 수 있었는데...
색감 역시 명도는 높지만 채도를 떨어뜨린 색들을 사용함으로써 밝고 화려하지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등장 인물의 설정이나 디자인 역시 톡톡 튀는데,
극 만화 형식의 캐릭터들과 카툰 형식의 캐릭터들이 한 자리에서 전혀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만화는 만화 자체적으로 독창성과 개성이 강하다.
(나는 양영순 작가의 '1001'에서 받았던 느낌을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캐릭터가 풍부하거든!!)
주인공 캐릭터 역시 한 번의 이야기에서만 써먹기는 아까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듯한 분위기이다.
더군다나 그가 퇴마를 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원귀의 형태, 진실, 까닭이라는 세가지가 갖춰져야하는데,
이것은 괴담이라면 갖춰야할 기본적인 요건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요괴를 잡는 퇴마물이 아니라
괴담이 갖춰야 하는 요괴의 모습과 요괴가 되는 이유와 요괴가 되어서 행하는 일들이
반드시 이야기되어져야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혼자만의 상상이지만, 이 편의 주인공이 여행을 다니는 것을 중심으로
따로 시리즈물을 만들어도 충분히 먹힐 것 같다.(라고 쓰고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로 읽는다.)


이 연작은 내가 좋아하는 이토 준지와는 다른 매력으로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토 준지가 순수한 공포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은 공포 자체가 초점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전통의 괴담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포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들 안에는 순수하게 인간이 있었고 그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었다.
이 작품 전에 보았던 '항간에 떠도는...'처럼 괴담이라는 것 안에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괴'의 마지막 이야기를 보고 있다.

P.S : DVD 소장 목록이 하나 더 늘어야겠다..; 자금적 압박이 심해지는군..ㅋ

P.S 2 : 위의 사진은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 약장수로 등장하지만.. 역시나 평범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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