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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 Man from Earth [리처드 쉥크만] 본문

감상과 비평/영화

영화 - The Man from Earth [리처드 쉥크만]

☜피터팬☞ 2010. 9. 2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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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대학의 교수직을 맡던 존은 10년간의 근무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준비를 하고 있다.
 존의 동료들은 종신직도 거부하고 떠나는 그의 환송회를 위해 그의 집으로 모여들고,
 떠나기 전 존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1만 4000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인류학, 생물학, 심리학 등 자신의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그의 동료 교수들은
 존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그에 관해 묻고 대답을 듣게 된다.

 시간차를 두고 나와 무척 가까운 두 사람이 내게 추천을 한 영화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아.
  네가 보면 무척 좋아할만한 영화임에 틀림없어."가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근래에 이래저래 시간이 좀 있었던 지라 두 사람의 추천을 믿고 영화를 골랐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의 전반적인 구성은 '진실게임'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될 것인가?
 여기에는 상호보완적인 두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의 기준은 그 사람과 나의 관계의 기저에 깔린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내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딱히 상대방의 말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또한 평소에 그 사람의 언행이 불성실하거나 믿지못할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그의 말을 믿지않을 이유도 없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신뢰라는 기준을 충족시킨다면
 그 다음의 기준은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부분일 것이다.
 나는 어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사고날 뻔 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그냥 비를 쫄딱 맞았다 등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식선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의심부터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신뢰'는 강화되고
 이렇게 강화된 '상대방에 대한 신뢰'는 상대방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한 수용을 더 쉽게 한다.
 이 영화에서 사건의 시작은 바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상대방'
 '상식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다.

 교수직을 맡고 있었고 충분히 믿고 신뢰할만한 언행을 보여준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구석기 시대부터 살아온 사람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술이라고 해봐야 접대용으로 마신 조니워커 그린 한잔이 전부.
 술자리 농담도 아닌 떠나기 전에 해둘 이야기라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동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흥미를 갖는다.
 아마 잘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십중팔구는 미친 소리로 치부하면서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말이 과연 사실인가 아닌가를 밝히려는 동료들의 질문이 시작된다.
 내가 흥미있어하는 포커스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물리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사진 혹은 영상들이 물리적인 증거가 될 수는 있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경험한 사건의 경우에는 그 사건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의 말이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한한 것이고 1만 4000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기는 무리다.
 또한 우리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큰 흐름을 제외하고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래 살았고 짧게 살았고의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에디스가 특정연도에 어디에 있었냐고 묻고 이에 존은 다시 되묻는다. "작년 오늘 어디에 있었냐고."
 누군가의 이야기가 신뢰할만하냐 그렇지않느냐를 판단하게 하는 가장 큰 기준은 이야기의 논리적인 흐름이고
 세세한 묘사나 구체적인 기억은 그 큰 기준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지,
 세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나 기억이 불분명하다고 해서 이야기 전체를 거짓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문제는 영화 속에서 계속 지적하듯이 그런 내용은 교과서에 실려있는 내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의 이야기에 대한 진실게임에서 부딪히는 두번째 문제는 한 개인의 경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누군가와 이야기한다고 하자.
 우리는 그 사건을 언론과 매체를 통해서 종종 접해왔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누군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큰 흐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원인과 결과에서 언론과 매체가 잘못된 혹은 거짓된 내용으로 사건 전체를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좀 더 나아가 그는 정말 그 사건을 경험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건의 진실은 잘못된 것인가?
 결국 누군가가 어떤 사건의 세세하고 구체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사건의 이면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쉽게 그 말을 받아들이거나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주장하는 사람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주장하는 사람의 말뿐이기 때문이고
 개인의 경험은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개인적인 감상일 뿐 역사적 실체를 판단하기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교과서는 큰 흐름은 알려주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국지적인 이야기는 알려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나 교과서에 실린 소위 말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관점에 따라서 변화하고 전복되기도 하며, 뒤늦게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사건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누군가의 말 속에서 우리가 인정하는 건
 그 사람이 그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교과서나 언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진짜 그 사건을 경험했는지 판단할 결정적인 근거는 못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건과 관련되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 사람이 거짓이라고 일축할만한 근거 또한 없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존이 1만 4000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그의 동료들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를 거짓말쟁이 혹은 정신병이 있다고 간단하게 일축할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두번째 문제로 넘어가면서 좀 더 복잡한 고민을 시작하게 한다.

 두번째 흐름은 단순히 진실게임으로 끝날 수 있던 영화에 제대로 활기를 불어넣은 부분이다.ㅋ
 동료들이 존에게 혹시 성경 속 인물과 만나거나 기록된 인물 중에 존이 있는지 물어보면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존은 이야기하기를 꺼려하는데 동료들의 물음에 마지못해 밝혀지는 엄청난 진실.
 존 자신이 예수였다는 것.
 존은 자신이 예수였으며 인도에서 부처에게 받은 가르침을 서양에 전하려고 했다고 밝힌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보고 넘겼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든 영화이고, 기독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서구 유럽에서도 봤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존은 영화 속에서 성경의 많은 부분은 다른 외래 종교나 신화에서 차용된 이미지와 이야기가 많이 있으며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 냉소적인 모습과 함께 현재의 기독교는 자신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 속 인물에 대해 기독교를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도 곁들여서.
 이 부분은 여러모로 논란의 여지가 될만한 부분이기는 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중동이나 아시아가 아닌 기독교 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제작한 영화니까.
 영화 속에서도 에디스는 존에게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극도의 분노를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민감해하는 종교 문제를 끌어들이면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기는 했지만...

 내게는 그냥 그런 소재였을 뿐..^^;;;
 종교적인 문제는 꽤나 민감한 문제이기는 하고, 영화 속에서 그것을 다뤘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꽤 이슈지만,
 관객인 나의 입장에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제였고,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의 비교는 우리 나라의 소설가도 한번은 채용한 소재이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모습이 서구 사회에서 세력을 넓히면서 왜곡되고 변질된 것에 대해서는....
 .......흠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ㅋ
 하긴 애당초 성경이 66권을 넘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도 많긴 하니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가 갖는 망상과 갖가지 문제는 아주 약간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다.
 그러고보면, 나야 관심이 있어서 이런 문제를 종종 고민해봤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겐 꽤 충격적일 수도...
 그런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하고 넘기지 말고 흥미를 갖고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영화 속에서 기독교에 관해서 말한 내용이 전부 진실이고(존이 예수였다는 걸 제외하고)
 기독교의 교리 전부를 싸그리 부정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문자 그 자체를 믿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은 해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암튼 영화에서 존의 과거 속에 예수를 넣은 것은 꽤 충격적일 수 있는 시도였는데...
 적어도 내게는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흥미꺼리로는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다.ㅋ

 영화는 이야기로만 계속 된다.
 특별한 장면적 연출이나 큰 동선없이, 무척이나 저예산스럽게 만든, 연극같은 느낌의 영화였다.
 오랫동안 이야기 거리로 사용되어진 불노불사의 인간이 소재였지만,
 불노불사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의 강력한 염원과 질투 등이 포커스도 아니었고,
 불노불사의 인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고민이나 고통이 특별히 담기지도 않은,
 아주 덤덤하고 담담한,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운 연출과 연기가 돋보인 영화가 아닌가 한다.
 내가 잘 아는 누군가가 나에게 존과 같이 고백한다고 하여도, 내가 보여줄 반응은 영화 속 동료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 그런 오랫동안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최초의 궁금증은 "정말이야??"라는 의문이 자연스럽잖아.

 소장하고 있는 만화 중에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 시리즈'도 불노불사의 인간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와 갖는 공통점은 '불노불사'라는 것 뿐, 관점, 주제, 분위기 등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르다.ㅋ
 불노불사...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소재였네..^^;;
 뭐, 그렇게 87분의 길지않은 영화가 끝나고, 반전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 약하게 마무리된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영화 속에서 린다 머피역을 맡았던 알렉시스 소프양이 꽤 예쁘게 나왔다는 것..ㅋㅋㅋ
 사진 속 왼쪽 인물입니다..-ㅂ- 근데 필모그라피 찾아서 보면 이 영화보단 별로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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