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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너의 과거 - #4 별이의 첫번째 봄 본문

일상의 모습/너의 모습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4 별이의 첫번째 봄

☜피터팬☞ 2019. 12. 9.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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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을 사러 별이와 엄마, 그리고 나까지 온 가족이 전기 마트를 방문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냥 무난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트를 나갈 때까지 별다른 특징없는, 그래서 어쩌면 그냥 묻혀지고 기억할 것 없는 그냥 평범한 하루가 될 뻔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쉽고 간단한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별이는 (아마 여느 아이가 다 그렇겠지만) 마트에 가서 자신이 살 것만 딱 사고 나오는 그런 아이는 아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이거 사자요"

하고 물건을 집어드는 타입이다. 그렇게 집어든 물건이 원래 사려고 했던 물건이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마나님과 나에게 그런 행동에 익숙해져있는 상태이고, 그런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반응해왔다.

"아니야. 우리 오늘 그거 사러 온 거 아니지."

약간의 실갱이는 피할 수 없지만, 보통은 순순히 자신이 충동적으로 고른 물건을 내려놓고,

"그래요. 그럼 그거 사자요."

하고 원래 사려던 물건으로 관심을 돌렸다.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엄하게 하는 등의 약간의 변주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고는 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 날 별이는 병아리 장난감 상자를 들고는 결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 우리는 스케치북을 사러왔고, 그 장난감을 사면 스케치북을 살 수 없다고 달래기도 하고, 이런 식이면 마트에 함께 올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도무지 듣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더니 혼자 계산대로 가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했다. 물론 경제적인 권한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의 블러핑이었기에 가볍게 무산되었지만. 평소였다면 상황이 마무리되었을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 모두는 서로의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포기를 종용했고, 별이는 조금도 타협할 생각이 없이 버텼다. 텐션이 올라가고 양측 모두 각자의 목적만을 생각할 때, 별이가 작전을 바꾸었다. 기습이었다.

그것은 기습이었다. 마나님과 나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기습은, 상대가 당황하면서 원래보다 몇배의 효과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거에 실패(?)한 적이 없는 똑같은 방법으로 별이를 대하고 있었지만 별이는 그동안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패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발견된 버그가 주는 당혹감처럼, 그 상황은 우리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별이가 울면서 바닥에 누워버렸던 것이다.

지금은 이 사진보다 더 어린이스러워졌다.

최근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토라지는 일이 많아지기는 했다. 별이가 점점 더 고집을 부리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행동은 예상 범위를 단번에 넘어버리는 일이었다. 별이는 자신이 고른 장난감을 쥔 상태로 울면서 마트 바닥에 누워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나는 마트에서 울면서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선적으로 취해야할 방법을 미리 정해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별이의 기습은 우리를 충분히 당황스럽게 하였으나, 그 이후 상황은 오히려 자신의 목적과는 반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나는 별이가 바닥에 눕기 시작한 순간 별이를 안고 마트 밖으로 나갔다.

울면서 소리치고, 발버둥치는 것으로 아빠의 손아귀를 빠져나오려면 몇년 후를 기약해야했기 때문에, 별이는 마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없이 마트에서 퇴장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 이 순간 만약 별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유괴범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다. 하지만 혹여 나를 유괴범으로 착각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별이와 나의 얼굴을 보면 아마 원래 이 방향으로 오려던 것으로 위장해서 우리를 지나쳤을 것이다. 별이와 나의 얼굴이 유전자 감식이 필요없을 정도로 닮았다는 사실이 이 때만큼 만족스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별이는 자신이 고른 물건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고 마트 밖에서도 계속해서 그 장난감을 주장하고 있었다. 울면서. 잠시 후에 마트의 다른 출구로 나갔다 겨우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된 엄마가 올 때까지 말이다. 나는 별이를 계속 안아주면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늘 그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고 혹여 그 물건을 사게 된다고 하더라도 별이가 이런 식으로 요구하면 결코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마나님과 나는 별이가 울면서 떼를 쓸 때 어떻게 대응하자는 진지한 논의를 한 적은 없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둘의 암묵적 합의는 동일했다. 설령 사주더라도 이런 식의 억지에는 결코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별이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마트 밖으로 나왔을 무렵부터 별이는 자신의 의도와 결과가 많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감정적인 부분까지 다스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쉽사리 울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별이를 마나님과 나는 번갈아 안아주면서 오늘은 별이가 원하는 장난감은 사지 않을 것이라는 걸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별이가 충분히 엄마와 아빠에게 협조를 잘 해주었을 때 장난감을 사자는 협약을 맺는 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항상 네 세계가 궁금하단다.

별이의 새로운 작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마나님과 내 입장에서는 쉽진 않았지만 나름 만족할만하게 그 상황을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대부분의 육아하는 가정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일어날 이번 에피소드가 나에게 던진 의미가 있다. 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나님과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종종 나왔던 주제와 관련된 것이다. 별이가 마트에서 보여준 모습은, 나에게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그 상황을 실재의 세계로 끌고 들어온, 기념할만한, 혹은 기억할만한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것은 별이가 나와 분리된 존재고 언젠가는 독립할 존재라는 의미의 경험이었다.

아이는 독립된 존재이고, 언젠가는 부모에게서 독립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아무리 아이가 나와 닮고 나를 좋아하고 나를 따른다고 하여도, 내가 곧 아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는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경험해나갈 것이다. 내 생각과 행동이 아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겠지만, 나의 것이 그대로 아이의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또 행동하려고 할 것이다. 별이와 나의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차이가 좁혀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별이가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꽤 오랜기간 동안에도 아이는 우리가 설정한 범위 내에서 행동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 범위를 설정할 때, 내게 필요한 것은 권위와 위력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바와 아이가 원하는 바가 충돌할 때 내 의지대로만 하기보다는 아이의 생각과 욕망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위치를 조금씩 조절해나가는 연습과 실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타이밍이 되었다.

결국 며칠 후에 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얻었다.

이제 별이의 목소리는 우리 집에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단순히 목청이 커지는 수준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우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은 내 입장과 종종 충돌할 것이고, 그 상황은 아마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충돌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이의 입장과 내 입장을 조정해야하는 순간에, 나는 과연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아이의 입장과 내 입장을 조율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끊임없이 성장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인생에 또다시 도전 과제가 생겼다. 인생에서 해결해야하는 숙제가 쌓여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나 뿐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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