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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동굴 [주제 사라마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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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작가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 약간의 고민을 곁들인 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밀란 쿤데라, 주제 사라마구 정도가 아닐까?'
밀란 쿤데라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집요하게 나를 물고늘어졌다면,
주제 사라마구는 이 세상과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던져왔다.
시내의 중심가에서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도공 시프리아노 알고르.
그는 딸 마르타와 함께 도자기를 구워서 센터에 납품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또한 그 센터에는 자신의 사위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센터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소비자들이 그의 물건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센터에 도자기를 납품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3대에 걸쳐 도공으로 살아온 그는 큰 충격을 받지만,
딸과 사위는 사위가 상주 경비원이 되면 센터로 이주해서 살자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해설을 보면
이 소설은 공산주의자인 사라마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
경제적 가치가 없어질 때 가차없이 내침을 당하는 사회.
거기에는 어떤 동정이나 미련, 혹은 연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소비자의 요구와 생산자의 요구가 적절히 합의되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해설이 이 소설의 내용에 괴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설 후반부에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단순히 이 소설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돈의 흐름에 좌우되는 모습을 말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것, 좀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 '동굴'은 차라리 카프카의 '성'과 동일선상에 있지않을까.
시스템에 속한 삶. 거대한 틀 속에 맞춰져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자본주의던, 공산주의던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 순간 이미 시스템에 속하게 되고,
시스템에 적절히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원하는 것, 시스템의 원활한 기능에 필요한 것 등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한다.
인간 사회가 지금보다 덜 발달되었을 때는 그 크기도 작았고, 요구하는 것도 적었다.
물론 그것이 더 인간적인 삶이었나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인간적인 삶에 대한 수많은 기준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가치를 찾았던 것에 비해서,
지금의 거대한 시스템은 그런 것들보다는 시스템의 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가 평가가 된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부분도 간섭할 여지가 없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지적했듯이, 시스템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발달할 수록,
인간은 시스템 속에 속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명령받은 것들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책임져야하는 일들은 아무것도 없게 되고 죄책감도 크지 않다.
모든 것은 시스템이 결정하는 것.
그 안에서는 개인적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거대한 집단의 일부분일 뿐이다.
거기엔 여론 조사와 통계가 있을 뿐이고 집단의 두리뭉실한 의견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인간 사회의 시스템 발전(규모적인 면이든 질적인 면이든)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제와서 다시 농경, 수렵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시프리아노가 도자기 판매를 거부당한 후에도 어떻게 해서든 센터에 물건을 팔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가 위해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정작 무서운 것은 거대한 시스템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것, 시스템 너머에 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현대적으로 풀어쓴 책이라고 소개되어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그림자일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현실이 정말 그림자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러 방법으로 습득한 지식을 통해 판단을 내리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림자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진실은 알지 못한 채 동굴(시스템)이 보여주는 만들어진 진실만을 볼 뿐이다.
그 곳에서 사는 삶 속에는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시프리아노가 센터의 삶 속에서 이상함을 느꼈던 것은 그가 비교적 센터의 시스템에 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만약 센터처럼 동굴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선택적으로만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동굴 속의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직접적인 방법이던 간접적인 방법이던
동굴 속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내리는 판단과 자신의 가치가
스스로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닌 조작되고 기만적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거대한 시스템 속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결코 알 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람자인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동굴을 떠난 후에 만나게 될 세상이 과연 햇빛이 내리쬐는 실체로 가득찬 세상일 지,
혹은 그것 조차도 더 큰 동굴의 일부일 지,
아니면 햇빛을 반사하는 달빛의 세계일 지를 판단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동굴(시스템)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군다나 동굴의 그림자를 만드는 강렬한 햇빛을 판단하기에 우리의 눈은 너무나 약하다.
이미 동굴은 우리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능력을 많이 차단해왔고, 우리는 그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글쎄.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는 말 뿐이다.
작가는 센터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소설 속의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은 우리의 고도로 발달된 사회이며,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많은 부분은 벌써 시스템에 속해있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은 바로 이 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져있다.
우리의 정체성이 과연 '나'라는 독특한 개인의 발현인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는 이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시프리아노는 60대의 노인이다.
이미 70을 넘은 작가는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충고하듯 시프리아노의 이야기를 썼을 것만 같다.
그 때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깨닫게 된 노인의 현명함으로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하듯.
그의 이 친절한 충고와 교훈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남겨져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어떻게 될 것인 지 본인들은 결코 알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 그 결과가 무엇일 지 결코 알지 못한다.
센터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식구이 무엇을 했는 지, 어떻게 됐는 지 나와있지 않은 소설의 결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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