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in NeverLand

변화에 대한 체험. 또 다른 '변신' 본문

머릿속 탐구/낙서

변화에 대한 체험. 또 다른 '변신'

☜피터팬☞ 2007. 1. 10.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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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 중에 별난 녀석들은 꼭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게 어떤 식으로든 별난 녀석들말이다.
뭐,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별난 녀석 중에 하나일런 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런 별난 대학 동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녀석의 별난 부분에 대해 말해보자면 대충 이렇다.
토목과를 다니면서 사시를 준비하는 친구.'-'
나름대로 이 친구와 이야기할 일이 많았는데, 생각하는게 참 멋지다.
외국의 경우에는 다른 전공을 가지면서 사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그 분야의 법적 자문을 하거나 법적인 처리를 맡아준단다.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보다 매리트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 친구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사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동기들이 집행부를 맡은 해에 토목과 학칙을 법문처럼 손수 만들 정도에, 지금은 이미 2차를 준비하는 친구.
대단한 녀석이다. 정말로. -ㅂ-

암튼, 그런 이 녀석이 불교의 선 사상에 매료되었다.
2006년 4월 즈음의 일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서양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의 관념의 세계에 빠뜨려버렸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에 대해 주변의 후배들에게 설법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나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물론 내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진실이나 진리, 앎, 존재의 문제와 사랑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터라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덕분에 연구실에서 형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친구랑 이야기하면 아예 짐싸서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만큼 한 번 시작하면 오래도록 이야기를 했다.
다른 후배들이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내 나름의 충분한 반론을 펼쳤었다.
흠.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긴 하지만, 그게 그 친구에겐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나와의 대화가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나지않아 전화가 와서는 조금 전에 끝났던 논쟁을 계속 걸어왔으니까.
그 때 그 녀석이 나에게 던졌던 질문은 단 하나였고,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넌 누구냐."

이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나다."

내 대답에 친구는 다시 처음의 질문을 던졌고, 나는 다시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리고 질문이 늘어갈 때마다 나는 나의 대답에 대한 부연 설명을 조금씩 덧붙였다.
그 친구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나의 대답에서 그 친구가 파고들 여지는 없었다.
당시에 나는 상계동으로 아르바이트를 가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전화 통화가 끝나지 않아 알바를 하는 집 앞에서도 한동안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조금도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대화를 마쳐야만 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어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을 수가 있는가.

하지만, 여기서 미리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그런 식의 대화를 꽤 즐긴다는 점이다.
흥미롭거든, 그런 대화는.
서로가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런 입장의 차이에서 생기는 또 다른 시선이.
그것 자체로도 배우는 것도 많고, 고민할 꺼리도 많으니까.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산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의 대화 때문은 아니었다.
그 친구가 찾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산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아무튼 그 후에 산에서 내려왔다는 소식까지 들었지만, 그 친구를 과에서 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졸업 후 취업이 목적이 아닌 사시를 준비하는 친구였으니 보기가 쉽지는 않았다.
때때로, 이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지내다가 2007년 1월 우연히 과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이 친구가 내게 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나는 그것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선들 중에 하나일 뿐인 그것에 느낌을 주기에 그 친구의 이야기는 너무 약했다.
더구나 그 친구가 취한 태도 역시도 그 친구의 주장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도가도 비상도'라고 말하는 친구가 그토록 자신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좀 우습게도 느껴졌다.
이야기하는 후배들을 붙잡고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못된 방법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친구의 모습에서 그가 추구하는 것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그런데 무언가를 얻고 온 이 친구의 모습 속에서는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있었다.

그에게는 여유가 생겼고, 조심스러움이 생겼다.
물론 여전히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알려주려는 모습은 남아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좋은 것을 나누려고 하는 지극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방법의 면에서 좀 과격하고 끈질긴 면이 있었던 것 뿐이지..^^;
기독교인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 집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마음과도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때때로 거만하다는 생각이 들던 이 친구의 과거 모습을 어제의 그 모습 속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러워하고, 얌전하고, 무엇보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건냈다.
그가 변했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가 쉽게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변했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변했다. 분명히 변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하고,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며,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속박되거나 얽매임없이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무엇인 지를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변화가 너무 즐거웠고, 또한 신선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고 매력적인 것인가를 깨달았다.)
나는 이것이 선 사상이 위대하기 때문에, 혹은 불교가 진짜 종교이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믿음이던지 신실하고 올바른 믿음은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친구의 변화를 좋게 받아들인 이유는, 믿음이 무엇이건 간에,
그 친구의 변화가 무척이나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는 것에 있었다.
전에는 서양 철학의 계보를 모두 알고 그것에 대해 끝까지 반박하려던 그 친구가,
나와 니체와 플라톤의 사상의 옳고 그름, 혹은 정확성에 대해 논하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아는 것이 적어 함부로 말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투쟁적인 자세도 없이 그저 편안하게 자신이 느낀 것들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게 보였는 지.
종교를 통해서 악했던 사람이 착해진다는 사례 정도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비로우면서, 즐거웠다.

다음 번에 또 다시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서로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꺼란 기대가 자꾸만 생긴다.
아니, 그 때는 내가 좀 배워야할 부분이 더 많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바람직한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고, 실천하고 싶은 그런 자세들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서로가 좀 더 깊숙한 존재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또 나를 즐겁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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