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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하 [움베르토 에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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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읽어왔던 모든 책의 내용은 기억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비롯한 신상에 관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잠바티스타 보도니. 애칭은 얌보.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는 얌보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시골의 농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장기를 함께 보낸
소설과 음반, 만화를 찾아내면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보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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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은 언제나 내게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의 소설들은 나에게 일종의 지적 수집욕을 일깨우고
그의 천재성에 대한 질투와 동경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한마디로, 정말 읽을 맛이 나는 작품이 그의 작품이다.
소설 속의 고서적상이자 엄청난 독서가이기도 한 얌보는
아마도 움베르토 에코 자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움베르토 에코가 1932년 1월생이고,
소설 속 얌보는 1931년 말에 태어났다는 점을 비롯해서
많은 부분이 얌보와 에코가 동일인물처럼 보인다.
(소설 속에서 어린 시절의 사진이 나오는데... 나는 이게 에코 본인의 사진이 아닐까하고 추측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 얌보의 기억은 에코의 기억이다.
물론 소설적 재구성이 되어있을 꺼라 생각되지만..^^;;
수많은 삽화들과 함께 소개되는 소설과 음악, 그리고 만화들은 에코의 기억이자 이탈리아의 역사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은 얌보가 자신을 재구성하기 위해 선택한 자신의 흔적은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친 동시대의 기록이었다.
(이 소설의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2부 종이 기억'은 얌보의 직접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시대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2차 세계 대전을 관통하는 이탈리아의 문화적, 정서적 흐름을 짚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소설 속 얌보가 읽은 책들을 통해서 그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문화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소설 속에는 소설 삽화, 우표, 엽서 등 당시의 문화적 지표들이 실제 그림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딱딱한 설명문처럼 보여질 수 있는 당시의 문화적 맥락들을 얌보의 성장기와 더불어 재미있게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 속에 푹 빠진 이유는 당시의 유럽이 보여준 문화적 흐름이 흥미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에코와 얌보 그리고 나 사이에 무려 50여년이라는 결코 짧지않은 시간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성장기와 나의 성장기에서 보여지는 공통적인 흐름이 놀랍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얌보가 어린 시절을 재구성할 때 얌보가 아닌 나를 엿보고 있었다.
얌보가 시골의 다락방에서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들을 다시금 찾아낼 때
나도 내 기억 속에서 초등학교 교실 뒤에 꽃혀있던 학급문고들을 찾고 있었고,
얌보가 오래된 전축에 LP판을 올려놓으면서 추억의 노래들을 듣고 있을 때
나도 내 기억의 라디오 채널에서 라디오 방송과 그 무렵의 가요들을 흥얼거렸다.
얌보가 만화책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열광할 때 나 역시도 내 기억 속 영웅들을 찾아냈고
그의 사춘기를 구성하던 매체 속 히로인들 속에서 나 역시도 내 사춘기의 여인들을 끄집어냈다.
보물섬, 아이반호우, 삼총사,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위대한 왕, 해저 2만리, 셜록 홈즈, 디즈니 명작 동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015B, 이승환, 윤종신, 푸른 하늘, 김광석, 이선희, 전영록,
미래 소년 코난, 개구리 왕눈이, 철인 28호, 태양의 소년 에스테반, 로보트 태권 V,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
시대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서 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차이를 뛰어넘은 얌보(혹은 에코)와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 비슷했던 것도 향수를 자극했다.
얌보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수입되어온 미국 만화들이 어떤 식으로 각색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지 이야기한다.
미국 만화의 미국 국적의 주인공들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탈리아인으로 묘사되기도 했었고,
엽서나 포스터 속에서 미국인들이 험악하고 무식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수입된 일본 만화영화와 만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탈바꿈되어 있었고,
북한과 러시아 등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왜곡과 흑색 교육을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주입받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구성하던 물건들을 통해서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던 얌보의 이야기는
그가 다시 혼수상태로 빠져들면서 안개처럼 뿌옇게 실루엣만 제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적으로 시작된다.
'3부 ΟΙ ΝΟΣΤΟΙ'에서 비로소 우리는 얌보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실체에 접근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소설이나 음악과 같은 직접적인 매개를 통한 어린 시절 추억하기는 할 수 없었지만,
얌보의 성장기 속에서 변해가는 감정을 통한 추억하기는 계속할 수 있었다.
물론 얌보이 어린 시절 정치적인 혼란기 속에서 겪었던 경험을 나는 내 자의식이 성장한 후에나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반공 사상에 아주 잘 교육된 착한(?) 아이였고 내 주변엔 내게 그런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얌보의 긴 여정의 목적이기도 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 사랑한 릴라라는 아이에 대한 감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내가 얌보의 이야기에 감정이입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얌보가 릴라에게 고백하기 위해 혼자 상상하는 장면은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화끈 거리기도 했다.
나도 얌보처럼 혼자 자신의 환상 속 그녀를 현실의 그녀에게 마음대로 대입시켜서 상황을 상상하기도 했다.
(물론 현실의 그녀는 상상 속 그녀와 같을 이유도 근거도 없음이 명백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겁내지 마, 강도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라는 말 대신 '반체티가 여기에 살아?'라고 물은 것은
현명한 얌보는 했고 어리석은 나는 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차이였다.^^;;
얌보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환상을 눈치채고 한발 물러섰고 나는 끝끝내 밀어붙였지만.... 결론은 같다.ㅋㅋ
첫사랑은 그것이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의 환상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에 더 간절하고 애닳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첫사랑에 대한 열정이 자신의 인생을 계속 이끌어주는 힘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닌 듯.
에코가.. 아니 얌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면서 찾아내려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라는 감정은...
릴라에게 향한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자신이 가진 첫사랑의 감정이었다.
에코의 안내를 받아 얌보와 함께 서적, 음반과 같은 매개체로 시작한 어린 시절 떠올리기는
3부에서 얌보의 직접적인 이야기에서도 계속해서 나의 기억을, 그리고 읽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우리는(적어도 나는) 이 소설에서 에코의 이야기를 단순히 듣고 에코와 이탈리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더듬어보면서 에코와 함께 우리 마음 속의 로아나 여왕의 불꽃을 찾았던 것이다.
에코 역시 독자들이 각자의 로아나 여왕을 찾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얌보에겐 가혹하지만..ㅠ.ㅠ) 얌보의 첫사랑인 릴라를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리라.
에코를 통해 나는 얌보와 함께, 얌보의 어린 시절을 들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했었다.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슴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에코에게? 얌보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잃어버린 로아나 여왕의 불꽃을 찾기보다는 미래의 로아나 여왕의 불꽃을 찾아서 만들고 간직해야겠다.^^
그것이 아직 79년생인 내가 32년생의 작가에게 보내는 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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