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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습

2022년 3월 20일 토요일 날씨 비. 피터의 법칙

☜피터팬☞ 2022. 3. 2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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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서 중간계투만 하던 투수가 선발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공을 던진다는 행위 자체는 똑같아도 게임을 시작하는 위치가 주는 중압감은 중간계투와는 다르겠지.

야구에서 선발 투수가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스포츠 뉴스에서도 선발 투수를 비중 있게 다루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올라간 투수가 첫 선발에서 실수를 연발한다면...

 

최근 발주처에 중요한 보고를 할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계산 등 실무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회사가 바빠지면서 인원을 쪼개고 쪼개다 보니 갑자기 내가 보고하는 자리의 말단에 앉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보고하는 자리의 말단이라 앞에 나서야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실무를 끌어가는 입장이다 보니 디테일한 내용을 설명해야 할 때는 내가 진행하는 편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보고는 주로 얼굴도 익숙한 내부 임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고,

이번 프로젝트처럼 발주처의 높은 사람들과 직접 테이블에 앉아서 보고할 일은 없었다.

덕분에 처음 느끼는 압박감과 책임감 속에서 이렇게 일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업무 텐션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9회 말 투아웃.

시작 단계에서 발주처와 적당히 공감대를 형성하며 진행되던 예산 검토는

최종 담당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올라가 있었고,

덕분에 첫 번째 보고는 예산 금액을 말하자마자 리젝트 당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제대로 검토를 하기는 한 것이냐는 문책성 말까지 들었던 터였다.

5회까지 잘 던지고 있었고 특별히 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스트라이크가 전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량 실점을 당하고 역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원하는 결과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한 보고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예산 검토를 했고,

최종 담당자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까지 어떻게든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줄인 예산안을 들고 다시 최종 담당자와 마주 앉은 것이다.

 

이번에는 던지는 족족 스트라이크다.

이제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이번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다음 경기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완벽한 실투가 나왔다.

예산 내용을 살펴보던 최종 담당자가 내역서의 문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전혀 대꾸할 수가 없었던 것.

지적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서너 가지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펼쳐졌지만,

그 어떤 시나리오도 문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고를 진행하던 우리 회사의 임원들도, 보고의 디테일을 책임지고 있던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보고 내용을 중간에서 검토한 발주처의 다른 직원들도 당황해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미 한번 리젝트 당한 보고였고, 이번에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프로젝트 전체의 일정이 너무 빠듯해지는 시점이라서,

관련 내용을 보충해서 다시 보고 하겠다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신뢰를 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제대로 날아갔다.

힘겹긴 해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던 순간에 던진 완벽한 폭투.

 

다만 발주처도 더 이상 승인이 미뤄지면 프로젝트의 전체 진행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문구만 확인하는 수준에서 예산 검토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 난처한 상황은 보고가 끝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끝나고도,

퇴근하는 길에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해서 날 괴롭혔다.

나,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었나??

 

경영학적 원칙 중에 피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공돌이 출신인 데다가 경영과 관련된 것은 교양 수준으로도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피터의 법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어떤 조직에서 개인의 능력과 맞지 않는 직책을 맡게 되는 문제에 대한 법칙이다.

이를테면 기계를 잘 다루는 현장 엔지니어가 직급이 올라가서 부하 직원들을 다뤄야 하는 위치가 되면 업무 수행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

 

언젠가 우연히 이런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나를 저 법칙 속에 넣어두고 항상 고민하고 있다.

직급이 올라가고 하는 일이 조금씩 다양해지면서 매번 내가 지금 제대로 내가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결론은 언제나 나 혼자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내 주변 동료들의 도움이 없다면 과연 내가 이 일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도 어쩌면 내 운이고, 그 운도 내 능력의 일부이긴 하겠지만

내가 오롯이 내가 맡은 일을 문제없이 처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로 끝난다.

사회생활의 경험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그런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지고 굳건해진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변 사람들에 고마움을 느끼고 겸손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줄어드는 부분도 있다.

물론 중간중간 이런 균형이 역전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끝나고 나서 돌아보면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 속에서

내가 실제로 발휘하는 능력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생겨난다.

아, 그 잘난 척하던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간 거냐.

 

새롭게 생긴 업무에 대해 아직 적응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그만큼 경험이 부족해서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부분도 있을 거다.

언제나 숨이 꼴딱꼴딱 차오른다고 느끼면서도 그래도 하나씩 넘기는 걸 보면 아직 여력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다만 가능하다면 완전히 숨이 차올라서 도저히 못하겠다 싶을 때 떠나기보다는,

한계가 오기 전에 멋진 뒷모습을 남기면서 손뼉 칠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지.

물론 현실은 가진 자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이라 벌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벌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슬플 따름이고.

지금은 언젠가 이야기했던 "3X3 아이즈"의 초반에 못 해, 못 하겠어, 이걸 어떻게 해 하고 징징대면서도

결국엔 파이가 있는 고층 건물 꼭대기에 아무 능력도,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올라간 야크모처럼

그냥 계속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한계가 왔는지, 아니면 아직 남았는지도 체크할 수 있는 방법도 아직 모르겠고 말이야.

 

실투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게임은 어떻게 마무리되긴 했다.

매끄러운 결과도 아니고 만족스러운 성적도 아닌, 순전히 운이 좋아서 해결된 상황이 영 마뜩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발 투수의 자리를 바로 빼앗을 것 같지는 않고, 이제 다음 게임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실수를 경험으로 다음에는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야 하겠지만...

ㅋ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또 할 거야, 이런 실수.

아마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다음 경기가 더욱 불안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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