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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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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단 심판관이 횡횡하던 14세기의 한 수도원.
황제측과 교황측의 종교적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황제측에서 파견된 영국 바스커빌의 윌리엄 신부.
하지만 윌리엄 신부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 수도원에서는 한 수도사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윌리엄 신부의 뛰어난 통찰력을 본 수도원장은 황제측과 교황측 대표가 도착하기 전에 이 사건을 마무리짓고 싶어하며 윌리엄 신부에게 이 사건의 수사를 맡긴다.
하지만 하루에 한명씩... 묵시록적 예언의 형태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
윌리엄 신부는 이 사건이 기독교 세계의 자랑이자, 이 수도원의 자랑이기도 한 장서관에 있다고 보고 조사를 펼치지만, 여기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가며 그의 조사를 방해한다.
점점 불안한 양상을 띄며 대립해가는 종교 회의와 추리와 우연이 얽혀들어가며 밝혀지는 모든 비밀...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라는 거대한 줄기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에코가 천재라고 불리는 것은 아마 그의 이런 능력 덕분이겠지.
그럼.. 어디 내가 잡아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보자.
중세의 셜록 홈즈 - 바스커빌의 윌리엄, 와트슨 - 멜크의 아드소.
윌리엄 신부는 놀라운 추리력과 관찰력, 그리고 상대를 제압하는 화술 등으로 이 소설 속에서 홈즈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물론 그의 소설 속 역할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의 조수인 그 당시 수련사 신분의 아드소는 와트슨의 역할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홈즈를 보필하면서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메꾸어주는.
이 소설은 묵시록적 예언에 따라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나는 특히 이런 식의 배경을 깔고 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나의 심령학적 관심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의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는...
전설, 혹은 민담, 혹은 예언이나 마을의 특정 상황에 저주같은 것을 오랫동안 들어온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이런 사건에 대해 경외시하거나 두려워해서 나서기를 꺼린다.
결국 이런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이런 것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외부인이나 혹은 이런 이야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윌리엄 신부는 이 수도원과는 상관없는 외부인이다.)
하루에 한 사람씩 묵시록의 예언처럼 죽어가는 사람들과 윌리엄 신부의 추리와 주변 인물들의 진술들을 통해서 우리는 범인에 한걸음씩 다가간다.
하지만, 범인을 추리하기란 역시 그리 녹록치는 않다.
물론 작가는 범인에 대한 힌트와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작품 곳곳에 뿌리고 암시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종의 연막까지도 함께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연막이라는 것.. 우리의 올바른 시야를 가리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지막에 윌리엄 신부와 범인의 입을 통해서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연관이 없는 엇비슷해 보이는 개별의 두 개체를 무의식 중에 연관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의식되지 않고, 집중하지 않으면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범인을 알기가 힘들다.
혹 범인은 추리해내더라도.. 아니 추측하더라도, 범행의 목적과 저의,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접근하기가 무척 어렵다.
덕분에 마지막에 모든 것이 백일하게 드러났을 때 느껴지는 전율.. 혹은 감동은 마치 코난 도일의 작품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의 마지막에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움베르토 에코를 찬양할 진 저...)
또 하나.. 거장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은 단순한 추리 소설 그 이상이다.
이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수많은 철학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고찰과 탐구와 비교.
윌리엄과 호르헤를 통해서 반증되고 대립되고 토론되면서 점점 발전해나가고 증명되어지고 말하여지는 에코 자신의 생각과 주장. 철저한 엄격함과 통제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않는.. 독단과도 같은 호르헤의 진리에의 고수.
이것은 베네딕트회의 입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질서, 기존의 세력에 대한 입장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 믿어졌던 것, 그리고 그들이 따르던 것, 진리로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어쩌면 의심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고수를 하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에 대해서(여기서는 성경 혹은 하느님의 말씀) 다른 식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시작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성을 통한 탐구와 허용성에 로저 베이컨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윌리엄의 대립.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신부의 입장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프렌체스코회의 대표격인 사람이자, 또한 이성에 대한 진리의 탐구.. 그 당시에 막 태동하고 있던 과학적인(이성에 의한) 접근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접근과 허용성.. 그리고 그 시대에서는 대범하게 혹은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는 수많은 배타적인(이교적인) 문화에 대한 수용을 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웃음'에 대한 각 종파.. 베네딕트회와 프렌체스코회의 입장이었다.
단순히 보면 두 종파의 신학적 교리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좀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진리의 접근 방식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 윌리엄의 유일한 아군이자, 친구인 아드소는 베네딕트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은근히 비치고 있는 화합과 공존의 한 측면이 아니었을까??
청빈의 문제에 대한 교황과 황제의 입장과 정치적인 대립에 대한 당시 사회 또한 현재의 사회에서의 종교에 대한 입장.
이 문제는 신학적 문제 혹은 철학적 문제나 하나의 논점에 대해서 접근하는 에코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교황 22세와 루드비히 황제의 대립) 그 당시의 문제들에 대한 고찰과 함께,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인 입장의 발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프렌체스코회가 교회 혹은 수도사들이 청빈해야할 것.. 즉 재물에 대한 사용권에 대한 것에 문제의 핵심을 두고 있는데..
이 당시의 교황은 제물에 대한 욕심과 재력, 그리고 교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 의해서 상당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행사하고 있었고,
황제(들)은 이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견제의 방법으로 프렌체스코의 청빈 사상을 두둔하게 됨으로써 일어나게 된 일들이다.
이것은 프렌체스코회와 그의 소분파들을 정통으로 할 것이냐, 이단으로 할 것이냐의 문제와 더불어 황제와 교황 중 어느 쪽이 실질적이고 세속적인 권력의 우위를 점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단순한 두 정치적 세력의 대립 속에 담겨있는 문제의 접근과 동시에 실제 회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는 두 세력에 대한 조소.ㅋ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또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문제가 더 있다.
실질적이고 부조리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으로서의 이단 심판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의 유지와 권력의 횡포를 통한 이단 심판의 공포와 두려움.
이 소설 속에서는 이단이란 무엇이고, 그것들은 왜 생겨나며, 어째서 지지를 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끈임없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아드소는 간접적으로 이단 심판의 문제와 맞닥드리게 되고, 그 실체를.. 그 당시의 모든 이단 심판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 우리가 알기로는 적어도 대부분은 그러했을 것이라는 식의 이단 심판을 만나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보여지는 이단심판의 정체는, 실제 성경이나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이단이냐 아니냐보다는
정치적인 입장, 즉 기존의 세력이나 기존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수단을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으로써 종교를 이용하고 이 종교를 통해 상대방을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살인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
그를 천재로 부르는 것에 나는 주저함이 없다.
지금 내가 말한 이 몇가지의 이야기는 전체의 이야기를 몇가지로 떼어놓고 본 것이다.
그를 천재라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저 각각의 이야기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소설 전체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져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고, 또한 그것은 마지막에 윌리엄이 말하는 진리에의 접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들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코가 마련해놓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리고 그의 친절한 보충 설명을 들으면서 소설의 마지막에서 윌리엄과 범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윌리엄이.. 그리고 에코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진리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실제의 진리(이 소설 속에서는 성경과 하느님)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그리고 올바른 접근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하는가?
무엇이 과연 진리에의 올바른 접근인 것인가? 아니, 진리 자체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수많은 논제들을 이 책에서는 자연스럽고 어렵지않게 던져주고 나의 생각과 주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쓸 것이 너무 많은데.. 다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따로 글을 쓰고 싶을 정도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고 도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미 장문의 글이 되어버렸다. 나의 짧은 글솜씨로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함이 아쉽고, 감히 에코를 따라잡으려는 오만은 버리려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흥미를 배가시켰던 것 중에 하나는 작가의 서문이었다.
그는 이 책의 소재가 되는 내용을 우연히 얻게 된 한 고서적에서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책은 아쉽게도 사라져버렸고, 그 후의 조사에 의하면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실제로 그 책이 존재했는 지 존재하지 않았는 지.. 아니, 작가의 그 서문 자체가 작품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려고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인 지 아닌 지 조차 나에게는 확인할 길이 없다.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수도원 역시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버렸기 때문에 고증을 통한 확인 또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책이 실제로 존재했든 안 했든, 그 책의 저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가 실제 인물이건 아니건..
그는 지금의 나에게는 (소설 속에서건 현실 속에서건) 존재했던 인물이고..
아드소라는 사람이 경험했던 것을..(허구이건 혹은 사실이건...) 나는 읽어서 알고 있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 '장미의 이름' 마지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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