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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 - 야망과 허영. 그 거대한 에너지 본문

머릿속 탐구/칼럼

나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 - 야망과 허영. 그 거대한 에너지

☜피터팬☞ 2005. 2. 1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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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동아리 선배인 방개형이 말했다.
(물론 저 '방개'라는 것은 별명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름보다 익숙하다.)

'허영심이 강하고 야망이 큰 인간은 결국 그 스스로에 의해 크게 된다.
야망은 없이 허영심만 강한 인간은 단지 인기를 얻는 것에 만족할 뿐이고
야망은 크지만 허영심이 없는 인간은 고독해지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없다.
야망과 허영심이 크고 균형을 이루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큰 일을 해낼 수 있다.'

이 때의 이야기의 배경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깔려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형이 저렇게 말한 배경에는 대표되는 인물이 있는데
야망은 없이 허영심만 큰 인간은 폼페이우스,
야망은 크되 허영심이 없는 인간은 티베리우스,
야망과 허영이 동시에 컸던 인물은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폼페이우스는 당대의 명장이다. 그는 로마 역사에 유례없이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거대한 야망을 볼 수는 없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는 스스로 움직이는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과 결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가 결국 카이사르와 맞서게 된 것도 원로원에서 그에게 그것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의 근거는 바로 인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다시 말해 허영심이었다.
그러나 그 허영심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없이 흔들리는 우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티베리우스는 정 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2대 왕이 된 인물로, 뛰어난 정치가이고 군인이었다.
그는 실질적인 정치가로 사치를 싫어하고, 규정과 규율을 바탕으로 행동했다.
그에게는 인기라던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와 임무를 제대로 알고 있었고, 가장 건실하고 실용적으로 그것을 달성한 인물이다.
덕분에 그의 훌륭한 정치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법도 한 것이 그는 연극이나, 전차 경기같은 오락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는 고독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전부였다. 결국 그는 훌륭했지만, 별로 달가운 대접을 받지는 못하고 떠났다.

카이사르는 훌륭한 군인이며, 정치가이고, 또한 사교계의 유명인이었다.
그는 작가였으며, 건축가였고, 외교가이며, 또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이름만 공화정이었지, 실질적인 제정으로 바꿔놓은 인물이었으며, 그렇게 하면서도 시민의 지지를 잃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인기인이었다.
그가 갈리아를 평정하며 지휘하던 군단과 관련된 일화들은 정말 훌륭한 지휘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교양이 풍부한 인물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정치적으로 능력있는 인물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시민들은 언제나 그를 좋아했고, 그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위해 해야할 일과 갖춰야할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인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착실히 수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하는 지도 아는 인물이었다.
카이사르야말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웅-위인보다는 오히려 영웅-이었던 것이다.


야망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서 희열과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야망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관심은 상관이 없다. 순수한 야망이란 그렇다.
그러나 허영심은 외부로 향한다.
자신의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인정, 혹은 인기를 얻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허영이다.
실제로 자신의 일이 실패하였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성공하는 것에는 야망과 더불어 허영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의 야망의 크기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야망이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도 자신 스스로 야망이 없었다고 생각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리 커다란 것이 못 되었고, 그래서 그는 멀리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야망보다는 허영이 훨씬 컸다.
나의 야망의 크기는 얼마인가?
내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가 나의 야망의 크기를 말해주는가?
혹은 내가 도달하고 싶은 내 인생의 정점이 나의 야망의 크기를 말해주는가?
그러나 적어도 내가 선택한 이 분야에서 단순히 어디에 취직하는 것 따위가 아닌 인정과 성공을 바라며,
이 성공에는 나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만큼의 위치라는 것이 존재하는 만큼,
나의 야망은 분명히 작은 크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야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허영심. 나는 허영심이 강한 인간이다. 나의 허영심은 결코 작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의 허영심은 내 행위의 근거 중에 하나이며, 나의 열정을 이루는 것 중에 하나이다.
나는 이 허영심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며, 이것은 분명히 나의 에너지 중에 하나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평가하고 나에 대한 어떠한 의견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나는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목표를 알고있고, 그것에 대한 기대를 걸 수록 나의 부담감은 커지며, 동시에 나의 행동력도 커진다.
나는 단순히 나의 성취만을 위해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기 때문에 움직이는 에너지보다 더 적을 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눈과 입은 나에게는 부담인 동시에 에너지가 된다.
이것이 허영심이며, 내 스스로 판단하기에 나의 허영심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야망과 허영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당연한 것들이다.
이것은 마치 걷고 있을 때의 두 발처럼 단지 하나만이 존재할 때, 인간은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
물론 때때로 아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단지 하나만을 가지고도 -야망 혹은 허영- 추진력을 가질 지 모르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니 오히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두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없어서는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
한 발이 지지할 때, 반대쪽 발이 나가고, 그 발이 지지할 때, 다시 반대쪽 발이 나아가면서 인간이 걷는 것처럼
야망과 허영은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균형을 맞출 때 진정한 추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야망도 있으며, 허영도 있다. 어쩌면 허영이 더 클런 지도 모른다.
야망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니, 야망이 부족하기 보다는 허영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
나는 야망을 키우거나 허영심을 줄여야한다.
허영얼 줄이고 싶지는 않다.
내 행위의 근거가 되는 것을 왜 없애야 한단 말인가.

야망을 키우자.

나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균형있게 끝없이 나아가는 인간.
그것은 내가 죽는 날까지 정해져있는 단 하나의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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