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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성찰 #2 - 용두사미형 인간 본문

머릿속 탐구/낙서

자아성찰 #2 - 용두사미형 인간

☜피터팬☞ 2019. 11. 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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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미술 시간에 미술 선생님 눈에 띄어 학교 대표로 사생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잠깐 딴소리를 먼저 하자면, 나말고 사생대회를 준비하던 다른 친구들도 더 있었는데, 그 중에 미대를 가지 않은 혹은 못한 친구는 내가 유일하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더 있지만... 아무튼.

 당시 사생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하던 나를 꾸준히 지켜보시던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에게 내가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인데, 지금와서 보자면, 선생님은 나를 꽤 정확하게 파악하신 거였다.

 그림에서 디테일은 마무리 단계이다. 전체 구도를 잡고, 큰 덩어리를 정리하다 마지막에 들어가는 것이 디테일이다. 전체적인 구성과 이야기를 세운 후에 그 구성에 맞는 중심을 잡아 배치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시작을 잘 하면 그 뒤는 수월한만큼 중요한 과정이긴 하다.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디테일은 그렇게 만들어낸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개성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디테일은 어쨌든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에서 마무리이고 그 동안의 과정을 멋지게 드러낼 수 있는 단계이다. 디테일이 전체 완성도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디테일에 따라서 그림이 갖는 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확실히 마무리가 부족하다.

 그림을 좋아하고, 만화를 좋아하던 그 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꽤 많았었다. 설정을 짜고, 인물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구성하고. 지금 보면 매우 유치하고 어설픈 것들도 많았지만, 당시 나이 수준에서는 꽤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무리가 언제나 부족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의욕에 차서 이것저것을 준비하지만,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쩐지 추진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변덕은 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만화나 그림, 아니 뭔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경우이긴 하지만.

 그런데 나는 이런 변덕이 단순히 그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이과생에 기술직으로, 그림과는 꽤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을 하면서도 이런 기분을 종종 느낀다. 프로젝트에 착수할 무렵에는 남들이 보기에 크게 의미없는 부분들까지 고민하며 일을 하다가도, 막상 대부분의 쟁점이 정리되고 실제로 수행만 잘 하면 일이 끝나게 되는 단계가 시작되면 갑자기 일에 대한 집중도가 낮아진다. 그래서 오히려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가 프로젝트를 일단락짓고 검토하는 단계에서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어떻게 보면 조금만 신경쓰면 발생하지 않을 문제점들이 눈에 띄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를 보고 그린 습작. 원래부터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 그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역시 다 그리고나니, 뭔가 디테일이 부족... 아니 이 경우에는 디테일이 약하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되었다.

 계속 이야기하지만, 이런 변덕과 집중력 부족은 나만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의 사람들이 많고 많겠지.

 다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그리고 그 느낌이 매우 우울하고 사람을 위축시킨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점과는 다른 점이다. 뭐랄까, 내가 그렸던 그림처럼 내 인생의 마무리가 그다지 괜찮을 것같지 않다는 막연한 기시감같은 것 말이다. 종종 그래왔던 것처럼 첫 구도를 잘 잡고 나쁘지 않은 흐름으로 끌어오다가 마지막에 가서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해서, 결국 첫 시도 자체를 퇴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최근 계속 떠오른다.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이것이 한 번만 주어지는 기회이고 만회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훨씬 더 크다는 것? 마음에 안 드는 지점에 왔다고 해서 빈 백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

 그게 꽤 무섭고 힘들어서, 어떻게 반전의 기회를 찾아보고는 있는데... 쉽지 않다.


 중년에 들어서는 기분이 이런 건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죽기 전에 지금보다는 더 나은 디테일을 만들어보려면 어찌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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