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in NeverLand
자아성찰 #4 - 하고 싶을 때 하자 본문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 손끝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꽤 즐거웠지만,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재능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것을 배웠을 때 그것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주변의 그림 그리는 친구들에 비해서 내가 그 재능이 월등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부족한 재능과 더불어 손도 느린 편이었다. 이것도 어쩌면 재능의 일부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림 하나를 그려내려면 나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다. 펜터치 없이 스케치만 했을 뿐인데도 계속 지우개질을 하고 덧그리고 하다보면 두어시간이 지나가고는 했다. 내가 한창 잡지를 보던, 우리 나라 만화가 부흥하던 90년대 중반에는 주간 만화지가 대세였는데, 일주일 동안 스토리를 짜내는 시간은 차치하더라도 스케치와 펜터치 그리고 스크린톤까지 작업을 해내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다만 그럼에도 내 그림 실력에 대해서 그다지 좌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의 내가 어렸고, 그림을 계속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아진 시간을 이용해서 계속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 순간 손도 빨라지고 그림 실력도 나아져서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만큼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미래는 내 예상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영역에서 전개되었다.
나는 전공 공부를 따라가기 바빴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많이 식어버렸으며, 달라진 인간관계와 내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그림 그리는 일에 이전처럼 매달려있지 못했다. 영화와 소설은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을 나에게 알려주며 그림 그리는 일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고, 당연히 그림 실력은 중고등학교 때와 비교해서 더 나아지지 않고, 빈종이를 가득 매우던 영감마저 떨어져버렸다. 느려터진 손은 어쩌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었을 뿐이고, 해야할 일들이 쌓여가면서 그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취업에서 결혼, 그리고 육아로 이어진 삶의 연속에서 그림에 투자하는 시간은 점점 사라졌고 결국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순간이 되어도 제대로 된 그림은 그리지 못하고 적당한 낙서만 끼적이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림은 나에게 향수일 뿐이다. 꿈 많고 가능성이 있던, 아주 많이 철이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시절의 나를 잊지 못하는 향수. 무언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 향수가 지금의 내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그 때의 나는 결론적으로 오지 않을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을 조금씩 미뤄두고 있었다. 오지 않은 미래에 쌓아뒀던 즐거움은 결국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하고 다시는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때의 내가 생각한 그 미래는 지금의 현실과는 좀 많이 다른 모습이고, 지금은 그림 그리던 즐거움이 사라진 공간에 새로운 즐거움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즐거움을 미래로 미뤄둘 생각이 없다. 아직 오지 않을 미래에 저축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림 그리는 일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일에 한창 불타올랐을 때, 그 즐거움을 미루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위치와 모습들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전공부터 직업까지, 그리고 가족 구성과 삶의 모습까지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미래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금의 나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처럼 막연한 미래에 지금의 즐거움을 미루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은 일단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뿐. 해라. 그리고 하자. 나는 현재에 살고 있으니까.
물론, 현재를 살자고 내가 미래에 미뤄두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진 한계는 분명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미래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혹은 예상하는 미래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미래가 어떻게 빗겨가는지 확실히 경험해봤으니까.
그래서 바뀐 미래에서 최소한의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만 미뤄두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의미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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