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in NeverLand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8 용길 내요 미스터 리 본문

일상의 모습/너의 모습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8 용길 내요 미스터 리

☜피터팬☞ 2021. 3. 1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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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가 어릴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한 3살 무렵? 우리 모두는, 우리 부부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 등등 모두는 별이가 무척 겁이 없고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높은 미끄럼틀을 즐기면서 내려오고, 정글짐도 서슴없이 다니는 걸 보면서 참 간도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 걸음도 아장아장해서 걷다가도 넘어질까 염려스러운데, 떨어지면 많이 다칠 수 있는 높이까지(물론 안전장치가 되어 있거나 보호자가 옆에 꼭 붙어있어서 낙상사고는 없었다) 아무런 동요 없이 올라가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2018년 4월 트니트니 활동 중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생각은 아주, 매우, 굉장히,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별이는 나이를 먹어가며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과감함은 사라지고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가끔 놀이터 같은 곳에서 3살 이하의 아이를 두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애가 겁이 없다는 담소를 나누는 걸 우연히 들을 때마다 혼자 생각한다. 그게 꼭 그렇진 않더라구요 라고.)

 

2018년 12월 키즈 카페에서

생각해보면 별이가 처음부터 모든 것에 다 겁 없이 행동했던 건 아니었다. 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 같은 것을 잘 못 봤다. 안 봤다고 해야 할지, 못 봤다고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하긴 한데,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는 듯하면 이야기를 보는 것을 거부했다. 별이가 3살 즈음됐을 무렵, 드디어 아이와 함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인어 공주 DVD를 틀었는데, 별이는 애니메이션이 시작되자마자 보지 않겠다고 소리쳐 말했다. 이유는 무섭다는 것...;; 아니,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는데..? 초반에 태풍으로 왕자가 물에 빠지는 장면까지도 안 갔던 것 같은데... -ㅅ-; 결국 나중에 디즈니 채널을 통해 주말 프로로 인어 공주를 끝까지 보긴 했는데, 시청하는 동안 내 무릎에 앉아서 안긴 상태로, 심지어 중간에 몇 번 안 보겠다고 말한 것을 달래가며, 엔딩을 봤다. 

 

별이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무척 싫어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긴장감은 결국 해결될 것이었지만, 별이는 긴장감이 해소되건 말건 일단 긴장감이 발생하는 상황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외로 다큐멘터리는, 그 주제가 뭐든 시청이 가능했던 것에 반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이야기는 일단 시작하자마자 거부하고는 했다. 애니메이션을 틀어줬을 때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청할 수 있던 애니메이션은 아마 토토로가 유일했던 듯싶다.^^;;

 

2019년 2월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가 시작한지 10분이 채 안 되어서 포기하고 나온 후... 배경의 판넬은 심지어 그 때 시도해본 영화도 아니었다..^^;;

나는 별이가 어떤 이야기든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되면, 이야기의 재미가 별이의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이야기라는 것이 엎치락뒤치락해야 재미있는 것 아닌가. 곤경에 처한 주인공이 그 곤경을 이겨낼 때 카타르시스가 있지, 밋밋한 상황의 주인공이 관객에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별이에게는 이후의 카타르시스보다 당장의 곤경이 더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고, 나중의 희망이 현재의 불안함을 견디게 해주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물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만큼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가슴 아플 수는 있지만, 그 가슴 아픔이 나중에 더 큰 보상이 되어 돌아오는 매력이 이야기라는 컨텐츠에 있는 것인데!! 미래라고는 없이 현재만 사는 녀석 같으니라고....-_-; 더불어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지면 별이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에는 조금이라도 개인 시간이 생기지 않을까 했던 기대도 산산조각.

 

다른 집 아이들은 오히려 시청 제한 연령을 넘어서는 작품들까지 시청하려고 해서 골치라던데, 별이는 우리 나이로 7살이 된 지금도 전체 연령 시청 프로그램까지 거부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그렇게 많다는 로보카 폴리를 집에서 제대로 시청 가능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기승전결이 나름 뚜렷한 작품들 중 그나마 시청 가능한 프로그램은 디즈니의 닥 맥스터핀스, 왕실 탐정 미라 정도. 이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이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곤경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 수 있다. 카봇이나 또봇 같은 로봇물은 물론, 빨강머리 앤도 우리 집에서는 틀어본 적이 없다. 별이의 성향은 이야기 구조가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고, 그저 예능으로 채워지는 캐리 티비가 최애 채널이라는 것만 보면 확실해지는 듯.

 

2020년 7월 키즈 카페에서. 오히려 무서운 놀이 기구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다.

별이의 행동 패턴으로 성향을 추측해보면, 곤란한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는 피해가는 타입인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주변 어른들이 하는 짓궂은 질문 중에 하나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의 질문에 별이는 둘 다 좋아라는 대답을 했다. 진짜로 엄마, 아빠 모두 좋아하기 때문일 거라고? 아니. 엄마와 아빠 중에 더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우리 부부가 없는 곳에서 할머니에게 둘 중 누가 더 좋은지 살짝 고백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게다가 별이는 비슷한 류의 질문에, 예를 들어 할머니와 할아버지, 함께 놀았던 몇 명의 친구들, 그중에 누가 제일 좋은지에 대해서 별이는 언제나 누구 하나를 고르지 않고 모두 다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누가 실망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별이가 거의 본능적으로 취한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학습에 의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부는 별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이를테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질문에 대해서, 딱히 감정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도... 그런데 정말 그런 부분은 우리 부부가 의식적으로 안 보여주려고 하는데...;;

 

아무튼, 그런 갈등 회피형(!) 인간인 별이에게 인생 처음으로 회피하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생겼다.

별이는 최근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보내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별이는 태권도장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했다. 태권도의 어떤 매력이 별이에게 어필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남자아이라서? 혹은 놀이터에서 가끔 보이는 도복 입은 형들이 멋져 보여서? 심지어 나는 별이에게 혹시 유치원에서 괴롭히는 아이가 있는 건지 슬쩍 물어보기까지 했다...^^;; 물론 당연히 그런 친구나 형은 없었고, 코로나 때문에 주저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집 근처에 있는 도장에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2020년 11월 태권도장에 처음 간 날

별이는 태권도를 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도장에서 도복을 처음으로 받은 날 도복을 입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사진으로 계속 확인할 정도로 좋아했다. 도장에서 하는 각종 활동부터 태권도 그 자체까지, 별이는 확실히 도장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별이는 태권도장을 열심히 다니고, 나는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잠든 별이만 볼 수 있었던 바쁜 날을 보내고 있던 중 마나님이 카톡으로 별이의 소식을 알려왔다.

 

2021년 2월 당시의 리얼한 대화 ㅋㅋ

상황인즉 그 날은 아이들의 승급 심사가 있는 날이었고, 별이는 무난히 흰띠에서 그다음의 흰노띠로 승급을 했다. 승급한 기쁨에 옆자리의 형이랑 떠들다가 젊은 사범님에게 혼이 났던 것. 그런데 꽤 따끔하게 혼이 났던지 별이가 도장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도장을 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밝히다가 울기도 하고, 심지어 자다가도 새벽에 깨서 울면서 다시 잠들기를 거부할 정도로 별이는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야 집에서 혼나더라도 별이의 반응을 보고 금세 얼러주었는데, 태권도장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을 테니 아마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린 마음 + 여린 마음의 별이 모습이 떠올라 귀엽기도 하면서도, 무서운 꿈을 꿀 정도였나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데, 회사 상황이 바빠서 별이를 직접 보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난감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 와중에 별이를 혼내신 사범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난감하시겠다는 염려도 들고.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감정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마나님과 함께 내린 결론은 최종적으로는 별이가 넘어야 할 시련이라는 것. 아이가 놀라고 감정적으로 상처 받은 부분을 케어해줄 수는 있지만, 이 문제에 맞서야 하는 주체는 결국 별이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짧은 대화로 내려졌다. 별이는 무척 두렵고 힘들 수 있겠지만, 모든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고, 그중에는 꼭 맞서야만 하는 일도 있을 텐데 이번이 그 첫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11월 도복을 입고

혼난 다음 날, 별이는 결국 태권도장에 가지 않았다. 마나님은 태권도장에 전화를 걸어 별이의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사범님께도 괜찮다고 말씀드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하루를 빠지고 나서야 별이는 두려운 감정이 조금 사라진 것을 발판 삼아 도장에 나갔고, 지금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있다.^^

 

용기를 내어 태권도장에 다시 가고서 약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마침 휴가 중이던 내가 별이를 데리러 간 적이 있다. 도장에서 내려오는 길에 넌지시 그때의 기억이 나느냐고 물어보았다. 별이는 이제 기억도 잘 안 난다면서 대답을 했지만, 뭐랄까... 정말 잊었다기보다는 굳이 떠오르고 싶어 하지 않는 듯 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별이도 막상 부딪혀보니 본인이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의 일이 무서워서 다시 꺼내기 싫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 때문에 들추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달까?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잘못을 했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후에 혼나는 일 때문에 안 다니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별이야... 막상 부딪혀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들이 많단다. 그리고 그렇게 커 보이는 문제를 넘어섰을 때 오는 즐거움과 희열이 또 있지. 앞으로 네 인생에서 지금처럼 피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을텐데, 그때마다 도장에 다시 나간 그날을 기억하면서 하나씩 맞서 나갔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어째서,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안 보는 거니...ㅠㅜ 너랑 보려고 내가 디즈니 명작 애니메이션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건만!!! 지브리 애니도 엄청 많단 말야!! 이제 이야기의 매력도 좀 알아주지 않을래????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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