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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습/너의 모습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1 당신이 잠든 사이

☜피터팬☞ 2021. 9. 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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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도봉산에서

마나님과 나는 생활 영역의 많은 부분에서 암묵적인 합의로 분업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는 일은 마나님이, 분리수거를 하고 기계적인 수리는 내가 하는 식이다.

물론 이게 칼로 무 자르듯이 정확하게 구분되는 건 아니고, 식사 후 테이블 정리같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부부는 묘하게 선호하는 분야(나는 이과, 마나님은 문과라서?)가 달라서 큰 트러블 없이 분업이 이뤄졌다.

비슷한 맥락이 육아에도 적용되었는데, 체력적인 면이나 관심사가 아이와 좀 더 가깝다는 이유로 별이의 놀이 육아는 내 몫이다.

마나님과 내가 함께 있을 때 별이와 주로 놀아주던 상대가 아빠라는 건 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와서,

마나님과 내가 각자의 할 일로 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을 때 별이가 처음으로 부르는 상대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다.

 

2021년 8월 정선 파크로쉬에서

별이는, 간혹 우리 부부가 각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함께 해주지 못하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있는 곳으로 먼저 찾아온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옆에 와서 내가 하는 작업을 물으며 은근슬쩍 내 무릎에 올라타고는 자기가 대신하겠다고 하는데,

그럼 나는 보통 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며 작업을 최대한 서둘러 끝내거나 미룬다.

간단한 작업이거나 사소한 작업에는 그게 통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경우에는 시간을 좀 달라고 별이를 타일러서 일단 내보낸다.

물론 그렇게 나가고 내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언제 끝나는지 수시로 묻거나, 뭔가 이야기를 하며 나를 자신의 바운더리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왜 엄마는 안 찾고 아빠만 찾는 거니!!!! ㅠㅜ

이런 상황이 별이가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포인트. ㅋㅋ

 

2021년 8월 강릉 브릭캠퍼스에서

외동이고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는 별이는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인 듯하다.

닌텐도 게임을 하거나 학습지를 푸는 것처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도 언제나 아빠나 엄마가 옆에 있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 집요한(?)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는 나는 별이의 곁으로 다가가기는 하지만 정확한 자리는 별이의 옆이 아니라 소파 위.

피곤함을 핑계로 별이의 시야가 닿는 범위에서 나도 편안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로 이동하고 나면 별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별이는 무언가를 할 때도 자신의 상상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주된 주제는 별이의 최애 게임인 마인크래프트.^^;; 

별이의 화법은 단순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빠, 그거 알아요?"로 시작해서 "그쵸?"로 끝나기 때문이다.

별이는 마인크래프트의 캐릭터들과 상황들에 대해서 유튜브에서 알게 된 지식과 자신의 상상을 결합해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던지며,

나는 그 이야기에 열심히 의견을 말하고 감탄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티키타카가 내가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실제로 소파에 누워서 대화를 하다가 별이가 게임에 집중하느라 잠깐 대화가 뜸한 틈에 잠든 적도...ㅋㅋ

물론 별이는 다시 열심히 날 깨웠고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2021년 8월 창동 집에서

덕분에 나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별이의 공간, 별이의 시간에 있게 된다.

별이가 어느 정도 크면, 함께 있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건 아직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다.

여전히 별이는 그저 함께 있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해주고 자신에게 관심을 주기를 원하니까.

그리고 집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상대는 엄마 혹은 아빠일 수밖에 없으니 별이가 엄마, 아빠를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꿈 많은 아빠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것저것 하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 ^^;;

프라모델 도색 작업도, 블로그 글쓰기도, 누군가의 방해 없이 즐기고 싶은 내 욕망은 별이와 함께 양립하기는 아직 어려운 상황.

 

2019년 3월 플랫폼창동61에서

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저녁을 먹고 적당히 정리가 되면 마나님과 나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이제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온전히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별이를 최대한 빨리 재우는 미션을 성공해야만 한다.

하지만 별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아니라서(;;), 재운 후의 시간은 이미 10시 반, 혹은 11시가 넘기 일쑤.

게다가 내가 회사를 마치고 별이와 놀아줄 것을 다 놀아준 후에도 쌩쌩한 체력은 절대 아니라서,

별이를 재우다가 나도 별이와 함께 잠드는 상황도 매우 흔한 케이스...ㅠㅜ

함께 잠들었다가 겨우 깨어났는데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소파에서 잠시 쉬지라고 생각했다가 그대로 아침이 되는 상황도 흔하다.

마나님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 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마음 반으로 그냥 편하게 자면 안 되냐고 이야기한다.

안 돼. 나 아직 꿈 많은(?) 40대야.

 

2021년 8월 창동 집에서 사촌형과 함께

그런데 최근 들어 주말에 사촌 형이 놀러 오게 되면서 별이에게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던 상황이 확 달라졌다.

가까운 곳에 사는 3살 많은 사촌 형이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 길어지던 중, 우리 집에 와서 놀게 된 것.

또래이다 보니 서로 통하는 문화 코드도 많고, 그동안 본가에서 종종 봐서 가족처럼 친근한 사촌 형이 오자마자

매번 "아빠! 아빠!"를 외치던 별이는 시종일관 "형아! 형아!"만 불러대고 엄마, 아빠는 말 그대로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다.

덕분에 사촌 형이 놀러 왔을 때는 별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작업방에서 마음껏 작업을 해도 된다.

심지어 엄마, 아빠에게 너무 관심이 없는 상황에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

다행히 사촌 형도 별이와 노는 것이 재미있는지 매번 헤어질 때마다 서로 아쉬워하며,

매 주중이면 이번 주말에 만날 수 있는지 서로의 아빠에게 문의가 쇄도한다.

지금까지는 항상 우리 집에 사촌 형이 왔던 터라 동생 내외는 내심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마나님과 나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주말에 별이의 사촌 형이 놀러 온다고 하면 쌍수 들고 환영하는 중이다. ㅋㅋㅋ

 

2017년 7월 북서울 꿈의 숲에서

나도 안다.

아무리 사촌 형이랑 노는 것이 좋아도 아직은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는 별이지만,

이제 곧 엄마, 아빠가 있는 곳에서 노는 것보다 엄마, 아빠 없이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재미있어질 테고,

가족끼리 좋은 곳에 여행을 가기보다 친구들과 동네 어딘가에서 시시덕 거리는걸 더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걸.

엄마, 아빠와 밥을 먹고 TV를 보며 대화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메신저를 주고받는 게 더 중요하게 되리라는 걸.

비록 지금 좀 귀찮고 때로 피곤하기도 하지만 더 많이 안아주고 함께 해주지 않으면 조만간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걸.

별이가 잠들기 전까지 내가 별이의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도록 만드는 것은

부모로써 가진 의무와, 별이에 대한 사랑에 더불어 이런 두려움들이 복잡하게 섞여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종종 별이와 함께 잠드는 일이 있어도, 여전히 나는 내가 집중하고 싶은 일들을 별이가 잠든 뒤로 최대한 미루고,

별이의 부름에 응답하고 반응하며 되도록 별이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쳐지도록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별이가 갖는 관심에 함께 관심을 기울이고, 별이가 하고 싶은 일에 동참하면서,

이제는 제법 커서 내가 대신해줘야 할 일들보다 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성장한 별이가 대견하기도 하면서, 함께 한 시간 동안 미처 해주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새삼 미안한 마음도 생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취미를 접고 온전히 별이에게만 집중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에게는 별이의 삶만큼, 내 삶도 중요하고, 아직은 이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할 만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니까.

 

여전히 앞으로 한참 동안 엄마, 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시간은 남아있기 때문에 내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도 남아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만큼 후회가 쌓일 일도 남아있겠지.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언젠가 먼 훗날 별이가 엄마와 아빠를 떠나 홀로 서는 순간에

나 자신과 별이에게 그나마 떳떳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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