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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2 내 아빠는 오덕후 (전편)

☜피터팬☞ 2021. 9. 2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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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오타쿠가 한국식으로 정착한 오덕후라는 단어가 있다.

현재 이 단어가 가진 다양한 층위와 의미 때문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좁은 의미로는 일본 애니나 프라, 피규어 등에 열광하는 사람을 뜻하고, 넓은 의미로는 어떤 분야에 매우 빠져있는 사람을 뜻한다.

별이의 아빠인 나는, 좁은 의미로나 넓은 의미로나 오덕후(로 볼 수 있)다.

 

2021년 10월, 이사를 위해서 수집품을 챙기던 중에

당당하게 오덕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뭐랄까...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걸 잘 아는 상황에서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

중고등학교 때 축구 선수로 뛰다가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람이라면

축구를 배워본 적 없는 사람보다 월등히 축구를 잘하고, 조기 축구에서도 눈에 띄는 실력을 지녔겠지만,

프로 선수들 수준을 오히려 더 잘 알기 때문에 축구 실력에 대해 칭찬을 들었을 때 스스로 살짝 민망한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보통 나는 어디 가서 쪼랩 덕후라고 이야기하는 편...^^;;

참고로 마나님은 내가 쪼랩 덕후라고 할 때마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라도 본 것 같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날 본다...;;

근데 진짜야!! 정말이라고!! ㅠㅜ

 

2021년 4월, 이사 후에 마련된 작업 방

쪼랩이건 고랩이건 어쨌든 오덕이기 때문에 집에는 관련 물품이 적지는 않다.

만화책, DVD, 프라모델, 피규어, 레고 등등 누군가의 눈에는 육아 용품(?)으로 비칠 것들이 사진처럼 이미 작은 방 하나를 채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내 주변인들은 대충 다 알고 있는데, 오덕후라는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없고 스스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듣던 이야기들은, '조금 크면 아이가 그거 다 망가뜨릴 거다' 라던가, '그거 나중에 아이 가지고 놀라고 주면 되겠다' 등등.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의 취미는 사라지는 우리나라 현실의 단면??

그리고 내 대답은 언제나 "안돼. 돌아가. 나눠줄 생각 없어."였다.^^;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이것들은 별이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니까.

 

2021년 6월, 가장 최근에 작업한 프라모델인 호이호이상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썼던 것처럼, 지금 나의 수집품과 취미생활은 내 추억이자 로망이고, 내 나름의 가치 실현이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단순히 아이가 만져보고 가지고 놀고 싶다고 줄 정도로 내 가치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아이가 내가 만들고 수집한 것들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이어가기 위해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 수집품을 가지고 노는 것이 내가 부여한 의미의 크기만큼 아이의 인생에 큰 의미를 주거나 교육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의 순간적 호기심과 놀고 싶은 마음을 채워주는 것보다 내가 살아가면서 부여한 의미들의 세계가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다.

별이가 태어남으로 해서 나에게 새로운 의무와 책임(그리고 그만큼의 사랑과 행복도!)이 생겼고,

그로 인해서 삶에서 수정해야 하는 지점들이 생겼지만 수정이 필요할 뿐 양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취미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음지의 영역이 아닌 이상에야 말이지.

 

2016년 12월, 내 장식장은 별이가 자연스럽게 내 취미 영역을 받아들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별이의 아빠인 나는, 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였고, 별이가 태어난 후에도 나다.

그리고 별이는 이런 아빠의 아들이고.

성별, 인종, 국적처럼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로, 별이는 오덕후인 아빠가 있는 것.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다른 가족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내가 별이를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만큼, 별이도 나를 이해해줘야 하는 영역이 있고, 그것이 나의 취미 영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직 아이인 별이에게 엄격함이나 따르기 어려운 기준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이 지점에서 별이가 마나님과 나의 말을 잘 듣는 순하고 얌전한 성향의 아이라는 조건과 더불어, 내 장식장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결혼을 하면서 마련한 장식장은 별이가 태어나서 걷기 시작한 후에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와서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아니 애초에 집이 작아서 어디 다른 곳에 두거나 숨겨두는 것은 그냥 불가능했지...-ㅂ-;)

별이가 장식장을 구경할 때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아니 순수하게 진담으로)으로 '이건 아빠 꺼야'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장난감과 구분되는 아빠의 장난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별이는 내 장식장에 있는 수집품들은 아직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을뿐더러, 박스에 있는 것도 내가 거부하면 순순히 물러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2021년 6월, 별이는,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장식장에 있는 내 수집품들을 구경하고는 한다.

물론 별이가 내 수집품을 특별히 원하지 않는 이유는 별이의 주된 관심사가 장난감이 아니라 게임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별이의 최애 게임은 마인크래프트인데, 다행스럽게도 내 수집품 중에 마인크래프트 관련 상품은 없다.

언젠가 별이가 관심 있는 컨텐츠가 늘어나서 내 수집품을 높은 강도로 요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긴 한데,

별이의 성향이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

(차라리 나랑 같이 프라모델을 만들겠다고 하는 상황이 더 일어날 법한데, 그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땡큐지!!)

잘 짜인 빌드업 덕분에 나는 별이와 아무런 트러블도, 걱정도 없이 내 취미생활을 무난하게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포스팅을 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오덕인 아빠 때문에 장난감도 마음대로 못 가지고 노는 불쌍한 별이에 대한 안쓰러움...... ㅠㅜ

......

이 있을 리가!!

이 포스팅이 전편인 이유는 오덕인 아빠(+이해심 많은 엄마)와 함께 하는 오덕 육성 프로그램(?)에 대한 후편이 있기 때문이다!!

오덕인 아빠와 그런 아빠를 이해해주는 엄마를 둔 별이의 놀이 이야기는 후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ㅋㅋ

 

2021년 7월, 각자의 여가 시간을 보내는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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