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in NeverLand

영화 '킹콩을 들다'가 불편한 이유. 본문

머릿속 탐구/칼럼

영화 '킹콩을 들다'가 불편한 이유.

☜피터팬☞ 2009. 7. 2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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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표가 아니었다면 전혀 볼 생각도 안 했겠지만, 명동 씨너스에서 '킹콩을 들다'를 봤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뉴스를 보시던 어머니는 내게 '미디어법'이 직권상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나는 왜 그렇게 '킹콩을 들다'가 불편했는지 깨달았다.

혹시라도 영화에 대한 글을 찾아서 오신 거라면, 읽지않으시는 편이 좋다고 권한다.
  안그래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좋은 영화에 대한 글도 많은데다가
내가 평소에 리뷰를 올리는 In My Sight도 아닌 여기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 글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영화적 해석을 바라신다면, 다른 분의 글을 찾아주시길 부탁한다.


못해도 보름 정도는 족히 매일 신문을 사서 보았던 것 같다.
굳이 신문을 사지 않더라도 집에는 매일 국민일보가 배달되어오지만,
국민일보의 시덥잖은 사설과 기사의 충실도에 실망해서 매일 경향이나 한겨레를 사보고 있다.
신문을 매일같이 사보고 있노라니 내 동생이 요즘 유행하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드라마가 끝날 때 탄식을 하는지 알 것 같더라.
도무지 다음이 궁금해서는 못 배길 정도로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은 안개속이다.
6개월이 넘은 용산사태나 쌍용차 파업, 어제 날치기 통과된 미디어법까지 어느 하나 어떤 결론이 날지 궁금해 미치겠다.
덕분에 이런저런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만 먹다가 차일피일 미루던 내게도 의욕(?)이 불끈 솟고야 말았다.
영화 '킹콩을 들다'와 연결되어서 말이지.

'킹콩을 들다'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지않았음을 동행한 사람에게 강조했다.
이런저런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감동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강요의 중심에는 주인공 영자를 비롯한 보성여중 역사들이 진학한 고등학교의 코치가 있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요 코치... 도저히 정상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주인공을 강탈(?)한 고등학교 코치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아주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모습 뿐이다.
욕설과 폭력 이외에 주인공들을 훈련시키거나 조금이라도 교사다운 모습을 보여준 기억은 전혀 없다.
그들이 예전에 자신이 싫어하는 선배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학대와 천대를 하는 것이다.
선배의 입지를 좁히기 위해 뒷돈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나름의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주인공들이 역경을 이겨내는 감동을 끌어내고 싶은 감독의 의도는 잘 알겠지만,
'말아톤'이나 '우생순'의 경우에는 저런 식의 무지막지한 설정없이도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끌어냈잖은가.

  그런데 그 코치가 불편한 이유는 단순히 성향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코치는 어쩌면 지금의 한국 사회, 좀 더 정확히는 지금의 MB정권과 같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혹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영화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광우병의 위험을 걱정한 사람들이 모인 촛불집회에서 MB는 자신의 결정에 따르지않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심지어 살기위해 농성을 벌이던 용산 철거민들은 죽음으로 몰고가기까지 했다.
쌍용 자동차파업에 대해 MB정권이 보여주는 유일한 반응은 경찰력 투입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에 있었던 분향소 강제 철거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코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주인공들을 때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코치가 자신의 입맛에 따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폭력과 MB정권의 그것은 얼마나 비슷한가.
코치가 보여주는 막가파식 폭력은 오늘날 이 땅위에서도 별 차이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코치와 MB정권은 공통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이 변화함으로 포장하고 싶은 것과 다른 사람의 눈을 가려 포장하는 것은 방법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변화하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이 알려지기를 원치않는다.
그래서 고등학교 코치는 계속 주인공들을 돌봐주던 이지봉(이범수)을 뒷거래를 통해 파멸시킨 것처럼
MB정권은 검찰을 통해서 MBC를 파멸시키고 싶어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선생님은 이지봉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중앙여고 이름을 뜯어내고 매직으로 이지봉을 쓸 때는 대회장 한 가운데서도 폭력을 휘둘렸던 것처럼
MB정권도 그렇게 진실을 알리는 언론들을 죽이고 그들을 좋게 포장해주는 조중동에게 방송진출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것은 한나라당이지만, 정권의 거수기로 변한 한나라당과 MB정권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주인공 영자가 학생체전 대회 당일 허리가 아파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코치는 진통제를 던지면서 이야기한다.
"그거 맞고도 못 참겠으면 기권시켜줄게."
문제의 본질은 뭔지 알지도 못하고 계속 키워오고 마지막에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것이었다.
내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싶었다.
노동법과 관련해서 사태의 해결이나 대비책은 전혀 준비하지 않은채 수수방관면서 그저 비정규직법 연장을 주장이랑 비슷하더라.
정권 취임 1년 반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가 이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MB정권의 모습이었다.
MB정권 역시 문제의 본질적인 접근이나 문제의 해결과는 관계없이 땜질식 처방만을 하려고 하고 있다.
만약 영화에서 주인공 영자가 진통제를 맞았다면 그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허리는 나았을까?
아니. 애당초 주사를 맞던 맞지 않았던 그녀의 허리는 이미 문제가 심각한 정도였을 것이다.
영화 속의 악역 코치에게 주인공 영자의 허리문제를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고 눈가리기식의 처방만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MB정권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대답할까.

이번 정권과 영화 속 코치는 여러모로 닮아있다.
영화 속에서 보성여중 코치의 이해하고 배려하는 가르침이 아닌 전근대적으로 폭력적이며 일방적인 교육방법처럼
이번 정권도 이해와 배려보다는 폭력과 일방적인 진행으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반대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리고 억압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치않는다.
거기에는 그 어떤 철학이나 상식도 없다.

야... 이렇게 쓰면서 보니까, 영화 감독이 어쩌면 무지 치밀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ㅋ
그러고보니 영화 속에서 못된 짓을 하던 테니스부 여학생은 나중에 나름의 통쾌한 복수를 당하는데
못되기로 따지면 테니스부 여학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코치는 어떤 식의 마무리도 없다.
그렇지. 이 영화는 MB정권 하에서 나오는 거니까, 혹시라도 나처럼 이런 식으로 영화를 이야기하면
영화와 관련해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감독... 치밀한데..-ㅂ-

그런데, 가만보면 영화를 본 모든 사람에게 일말의 동정도 얻지 못할 코치가 MB정권보다 괜찮은 점이 하나 있다.
아니, 관객의 분노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임무였던 코치보다 못한 점이 지금 정권에게 있다고?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코치는 단 한번도 '너희들을 위하는 거야'라는 식의 사탕발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이들을 때리면서 '내가 다 너희들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라던가
'내가 너희들 사정은 다 알지만 너희들이 이러면 안 되는 거지'따위의 말을 했다면 그에 대한 증오는 배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닥 양심이 있어보이지 않았던 그지만, 이 부분에 대한 것만은 인정해주겠다.
그런데 MB정권은 이런 염치도 없다.
애당초 양심없기로 따지면 고등학교 코치에 뒤지면 서러울텐데 요런 식의 사탕발림까지 더하니 이건 더 이상 비교불가다.
점퍼입고 시장에 나가 어묵 좀 사먹고 뻥튀기 좀 사주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들이 순식간에 서민정부가 되는 건가.
차라리 서민을 생각한다는 말을 하지않는다면 내가 영화 속 코치 정도의 수준으로만 생각하겠다.
서민과 중도를 부르짖는 MB정권은 희망고문도 아닌 그저 눈가림만을 하고 폭력과 무관심을 유지하고 있으니,
영화 속 고등학교 코치가 MB정권보다는 낫다고 말해도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건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으니 어따가 써먹을꼬...

영화 속 주인공인 영자를 비롯한 학생들은 순박한 학생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혹은 시대적 배경이 지금보다 과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는지
너무나도 고분고분, 그저 참고 또 참을 뿐이다.
영자가 그런 어려운 역경을 딛고 금메달을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의 신념 뿐이었다.
역도라는 스포츠의 특성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연습을 회상할 때도 그녀 이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부상이 있어도,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참아내고 이겨낸 것이다.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감동을 느꼈을테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물론 신념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 안에 확고한 목표의식과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신념과 노력에 아주 조금의 비난도 하고싶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은 영화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나마 찾아보고 싶던 나의 기대를 산산히 부숴버렸다.
그러니까 정말 신념과 근성만 있으면 아무리 큰 부상을 당해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인가.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서, 단 한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해야하는가.
그녀의 선생님이었던 이지봉이 결국 팔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허리를 평생 못 쓰게 되는 건 아닌가.
나는 수백만의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되기를 바란다.
신념이나 근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나 근성은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서 제도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의 지원 역시 필요한 것이다.
영화에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영자가 계속 역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선생님의 정신과 함께
주변에서 도움을 주었던 코치와 감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 혼자 잘나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꺼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우생순'처럼 처음에는 삐걱거렸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성장해나가면서 목표에 도달했던 이야기가
나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이야기로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마도 순전히 우연이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이야기임에 분명하지만,
영화 속에서 영자가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지봉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금처럼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물론 상황적으로나 현실적인 면에서 이지봉 선생님과 노무현 대통령을 일대일로 매치시키는건 불가능하다.
그저 영화 속 영자와 우리가 닮은 점이 있다면,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분에게 현실적으로 기댈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적 상황이 영자와 그녀의 친구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고 우리에게 힘을 미치는 인물이 비슷하지만,
우리는 영자와 그녀의 친구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저 신념과 근성만 있으면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서
신념과 근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역경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부당한 선생님에게 대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해야만 한다.
다음 번에 다시 이지봉 선생님같은 분을 만나야 한다고 체념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숨어있는 이지봉 선생님같은 분을 찾아내고 만들어내야할 것이다.

지금 나에게 너는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신념과 근성이 있다고 대답할 수 없다.
나의 신념과 근성이 약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해도 제대로 된 반론도 못할 것 같다.
지금의 나의 위치가, 지금의 나의 처지가 나를 점점 끌어내는 것만 같아서 두렵고 화가 난다.
아무리 영화 속 근성과 신념을 갖더라도 할 수 없을까봐 겁이 난다.
나에게 인생은 그저 금메달을 한 번따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자막이 올라간 후에도 계속 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은 그저 농심에서 나온 모든 것을 이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이 영화 속 감동을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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