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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 신춘문예 단막극 - 모래섬 [작 정소정 / 연출 심재찬] 본문

감상과 비평/기타

연극 - 신춘문예 단막극 - 모래섬 [작 정소정 / 연출 심재찬]

☜피터팬☞ 2012. 4. 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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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미숙과 상훈은 주택가에 막 입주한 부부다.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훈을 기다리며

  미숙은 새집의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고 있다.

  집안을 청소하던 미숙을 먼저 찾아온 것은

  남편인 상훈이 아니라 주택가의 경비원이다.

  경비원은 부부의 입주를 축하하며

  성능좋은 청소기를 선물한다.

  그러나 경비원은 선물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퇴근한 상훈과 미숙에게 경비원은

  두 사람이 "모래섬" 출신이 아니냐는 소문이

  주택가에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경비원은 주민들이 "모래섬"과 "모래"를 싫어한다는 말을 하고

  상훈의 어깨에 묻은 모래를 친절하게 털어주고 돌아간다.

  두 사람은 애써 잡은 행복을 놓칠까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집안에서는 끊임없이 어디에선가 모래가 나온다.

  

  검은 백조에 이어 두번째로 보게 된 정소정 작가의 세번째 작.

  판타지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연극 모래섬.

 

 

-주택가모래섬

 연극에서 배경이 되는 곳은 주택가이다.

 주택가는 상훈의 말처럼 비가 와도 비를 피할 수 있고, 바람이 불어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아름답고, 안정적이며, 미숙과 상훈이 그토록 원하던 행복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반면에 모래섬은, 모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형체를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무언가 안정적인 것을 세울 수도 없고 무언가 두루뭉술하고 황량하고 거친,

 게다가 지금의 미숙과 상훈에게는 현재의 자신들의 위치마저 위험스럽게 만드는 공간일 뿐이다.

 

-상훈, 경비원 그리고 미숙

 미숙의 남편 상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숙의 행복이다.

 주택의 입주가 결정된 첫날 상훈은 미숙에게 다이아 반지를 선물한다.

 그간 미루고 미뤄왔던 것이었다며 고가의 결혼 반지를 미숙에게 선물하고 자신은 모조 반지로 만족한다.

 그에게 속한 위험요소는 여전히 모래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훈의 직장이 모래섬이라는 것이 들키는 날엔 두 사람이 애써 입주한 주택가에서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 부분에 무척 조심스럽지만,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상훈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떨어진다.

 그는 주택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모래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모래섬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몸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모래는 그가 주택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로 보였다.

 그런 상훈의 반대편에는 경비원이 있다.

 주민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언제든 기꺼이 도움을 주며, 주민들의 불만을 수렴하기 위해 애쓰는,

 그야말로 주택가를 주택가답게 유지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경비원이다.

 경비원은 미숙과 상훈에게는 주택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주택가로 명칭된 존재의 대표다.

 경비원의 요구는 주택가의 요구이며, 경비원의 마음을 얻는 것은 주택가에서 정착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이다.

 그것이 항상 합리적이고 바람직하게 보이진 않더라도 경비원을 무시할 경우 그들은 주택가에서 계속 살 수 없다.

 그렇게 상훈은 모래섬에, 경비원은 완전히 주택가에 속해 있다면, 미숙은 주택가와 모래섬 두 공간에 걸쳐있는 존재다.

 그녀에게 주택가는 목표이자 현재이고 안정이며 행복이다.

 그녀는 주택가에 완전히 정착하기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모래를 끊임없이 걸레질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완전히 주택가에 속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비원이 선물한 간단히 모래를 흡수해주는 청소기를 쓰지 못하고 걸레질을 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는 

 이 연극은 "성장"의 알레고리를 가진 작품이다.

 모래섬은 우리가 지나온 단계 - 아이, 청소년, 학생, 누군가의 연인 등등 그렇게 우리가 밟아온 과거를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 전까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왔던 그 모든 것 혹은 어떤 것을 말이다.

 그리고 주택가는 그렇게 그 전의 단계에서 넘어온 지금의 단계, 지금 이 시간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위치를 의미한다.

 미숙과 상훈이 모래섬에서 애써 주택가의 소형 평수에 입주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누군가의 연인에서 또다른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지 않던가.

 그러한 위치의 변화는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지내왔던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너도 더 이상 애가 아닌데 왜 그렇게 철부지처럼 행동하고 있니."

 "이제 사회인이 되었으니 그런 철없는 생각은 그만둬야지."

 "이젠 그 사람이 아닌 나의 사람으로 내 평생을 함께 해줘."

 끊임없이 물걸레질을 통해 모래를 없애는 미숙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우리의 현재에 맞는 모습을 요구받는다.

 이제는 더 이상 모래를 집에 남기는, 주택가에 모래의 흔적을 들여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모래섬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우리가 속한 위치에 걸맞는 행동이다.

 게다가 주택가는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과거의 우리가 도달하고자 했던 미래가 아니던가.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든, 혹은 겨우 이루었던 간에, 지금의 위치는 과거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였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하고 싶었던 우리의 미래였던 현재가 항상 좋고 아름답기만한 것은 아니다.

 경비원처럼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그것이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미숙과 상훈이 주택가에 떠도는 소문을 잠재우고 주민투표에서 유리한 표결을 얻어내기 위해

 경비원에게 뒷돈을 준 것처럼 우리도 현재의 위치에 어울리기 위해 위선과 거짓의 모습을 가져야할 때도 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릴적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고민하고 과거의 자신과 다른 모습이 필요한 것처럼

 모래섬에서 살 때였다면 결코 필요없을 행동들도 주택가에서 살기위해선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동화속의 마법처럼 단 한순간에 이루어지진 않는다.

 

-현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모래섬에서 막 이주한 미숙에게 주어진 숙제는 모래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주택가의 완전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걸레질을 해야하는 미숙의 처지처럼

 우리도 현재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밀려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어른은 어린 아이가 아니고. 사회인은 학생이 아니며. 누군가의 배우자는 과거 다른 누군가의 연인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가 속한 그 위치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현재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그 위치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과거에 우리에게 요구되었던 것과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더 좋은 방법, 더 쉽게 모래를 없앨 수 있는 청소기가 있는데 왜 그것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현재에 막 발을 디딘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오히려 과거에 계속해서 해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숙은 성능좋은 청소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물걸레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과거에 대한 애착, 혹은 집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무르는 순간 우리의 과거는 모래처럼 바람에 날려 사라질 것이라는 걸,

 걸레질을 멈추고 청소기를 사용하는 순간 완전히 그곳에 적응하게 되어버린다는 걸,

 아이에서 어른으로,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연인으로, 육체와 정신이 모두 변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리의 마지막 저항의 모습인 지도 모른다.

 어른의 세계에, 사회인의 세계에, 다른 사람의 사랑에 막 들어섰지만, 아직 남아있는 과거에 대한 향수.

 그것이 선뜻 청소기를 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걸레질을 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러나 걸레질로는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고, 현재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청소기를 돌리기는 아직 썩 내키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괴로워할 때 우리의 과거는, 상훈이 사라졌듯이 그렇게 서서히 사라진다.

 상훈은 미숙이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 함께 해온 그녀의 과거이자 주택가 이전의 단계이다.

 동시에 그는 몸에서 끊임없이 모래를 쏟아내 그녀가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위협하는 원인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반복해서 말하듯 현재의 위치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과거의 모습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에 적응하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심지어 미숙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들던 과거는 서서히 구체성을 잃어버린다.

 

-다시 과거에서 현재 

 모래는 바위처럼 명확하지 않고, 먼지처럼 미미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각인시키는 존재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을 좀처럼 그리기 힘든,

 알알이 흩어져있을 때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게 흐릿한, 그 작은 알갱이들을 한데 뭉쳐놔야 겨우 그 모습이 보이는,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인 것들이 살아있는 모래 과거 그 자체 닮아있다.

 미숙이 계속 주택가에 남아있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리고 상훈이 그 바람을 들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상훈은 구체성을 잃어버리고, 과거로 회귀하다가, 과거 그 자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미숙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 미래에 남아있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과거는 미래를 가질 수 없다.

 과거가 이룰 수 있는 것은 현재이고, 미래는 그렇게 이루어진 현재만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상훈이 모래가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미숙이 현재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과거의 요구가 아닌 현재의 요구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있던 과거는 모래처럼 무너지고 이제는 파편처럼 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상훈이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과거가 모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모조 반지처럼 누군가에게는 가치없어 보일 지라도, 분명히 과거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단지 현재에는 그것이 더 이상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모습을 띄지않는 것일 뿐.

 그저 모조 반지처럼 우리에게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은 흔적만으로 남는다.

 

 미숙은 마지막에 경비원이 가져온 입주 확인 서류에 사라져버린 남편을 대신에 사인을 한다.

 그것은 잔인해보이지만 이상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비난은 가당치도 않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학창시절 학년이 바뀌면서 1년동안 친했던 친구들과 반이 갈려 한참을 슬퍼하더라도

 결국 금방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단짝이 되었던 것처럼,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가는, 그리고 현재에 곧 익숙해지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마지막에 청소기를 들고 모래로 변한 남편이 있는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과거와 현재의 위치에서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던 그녀가 서서히 현재의 모습에 적응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성장과 아픔

 그래서 이 연극을 나는 성장의 연극으로 봤다. 성장의 알레고리를 가진 연극으로.

 성장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디디고 살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과거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성장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과거는 모래처럼 자주 모습이 바뀌고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기가 어려우며, 무언가를 세우기도 쉽지 않다.

 우리에게 현실감을 주고 구체성을 주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현재의 위치다.

 현재의 위치는 우리에게 그 위치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며 때때로 과거엔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일도 강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더 좋은 위치 더 나은 위치를 찾아서 갈 것이다.

 주변의 평가가 되었든 혹은 나 자신의 평가가 되었든 그런 단계를 밟아 더 나은 자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덤덤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라는 걸 이 연극은 내게 말해줬다.

 우리에게 성장이란 흔히 극복, 발전, 성취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만,

 이 연극은 성장이라는 것이 항상 밝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그 성장 속에는, 현재의 내가 잃어버린 것들,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야하는 일들인 것이다.

 

 아픈만큼 성장한다고?

 아니. 성장하는 것 자체가 아픔이다.

 

-에필로그

 연극이 끝나고 막 나왔을 때 나는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변신이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씌여진 비극이었다면,

 이 연극은 어쩌면 그 비극에 희생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의 관점에서 씌여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실존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해석되는 이 연극에 대한 내 최종적인 해석은 성장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여전히 비극인 것은 변함이 없다.

 비애가 존재하지 않는 인생,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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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이 연극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계속 반복 재생되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되면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작가의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내면을 담고 있지만.^^;;)

 내가 아는 그녀는 비록 영화 동아리 출신이지만 전공과 직장은 연극과는 전혀 관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극작가가 된 후 뒤돌아본 그녀의 과거가 혹 모래와 같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소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 작품의 내용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글을 쓸 때의 생각이나, 이 연극이 어떻게 해석되어지는 지는 어쩌면 작가에겐 덜 중요할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가장 즐겁고 중요한 것은 극을 쓰고 그 극이 무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번의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P.S : 여기까지가 연극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다. 이 이후는 이 연극에 대한 내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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