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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4 내 아빠는 오덕후 (후편) 본문

일상의 모습/너의 모습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4 내 아빠는 오덕후 (후편)

☜피터팬☞ 2021. 11. 9.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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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좀 더 일찍 쓰였어야 하는 글인데,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서 약간 텐션이 떨어졌다. ㅋ 하지만 마무리를 안 지을 수는 없는 일!!

 

2021.09.29 - [일상의 모습/너의 모습] -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2 내 아빠는 오덕후 (전편)

 

나의 현재, 너의 과거 - #12 내 아빠는 오덕후 (전편)

일본어 오타쿠가 한국식으로 정착한 오덕후라는 단어가 있다. 현재 이 단어가 가진 다양한 층위와 의미 때문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좁은 의미로는 일본 애니나

yihas.tistory.com

 

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마나님과 나는, 여느 예비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이의 성향이나, 외모, 취미나 하고 싶은 일, 해주고 싶은 일들에 대한 대화들이었다. 그런 대화 중에 나는 우리 아이가 오덕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마나님은 그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지금도 나는 우리 별이가 오덕으로 자랐으면 하고 바란다. (물론 별이는 잘 짜인(?) 빌드업 속에서 훌륭한(?) 오덕으로 성장 중이다. 캬캬캬)
별이가 오덕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단지 별이가 아빠와 취미를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굳이 집안에 경쟁자를 만들고 싶지 않다. -ㅂ-;; 하지만 동지는 있으면 좋지. 너, 내 동지가 돼라.) 이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그 무언가에 푹 빠질 줄 아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표현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는 조건 아래서, 푹 빠진 무엇인가가 있다면 분야는 상관없이 지지한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표현. 악기, 가창, 회화, 조소, 작문, 운동, 철학, 과학, 수학 같은 고전적인 분야부터 만화, 애니, 프라, 레고 심지어 게임까지, 이 세상에는 푹 빠질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2017년 7월 창동 집에서. 좋아한다면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사실 어린 시절의 놀이 영역은 많은 부분에서 부모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부모의 관심 영역부터, 활동성, 경제력 등이 아이의 놀이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 아이의 세상은 대부분 곧 그 부모 자체일 테니까. 언젠가는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여러모로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성인이 되어 완전히 독립한 후에도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기억이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고려해보면 사실상 완전히 부모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선택지에 대한 호오는 결국 아이의 몫이다. 성장해나가면서 부모가 제공해주지 않은, 혹은 못한,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될 테고, 부모의 선호와는 관계없이 최종적으로는 그것들 중 자신이 끌리는 세계를 지향해나갈 것이다.

 

2017년 12월 방학동 키즈카페에서. 앞으로 네가 만들어갈 세계가 궁금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 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적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 그렇다고 장난감 하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고, 나름 장난감은 있었던 편으로 기억한다. 내 부모님도 여느 부모님들처럼 자식들이 해주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해달라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실 수는 없었고, 나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내 나름대로 좋아하는 분야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자신들의 호오와는 관계없이 내가 선택한 분야를 당신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프라모델을 대학생이 될 때까지 보전할 수 있었고, 주간 만화 잡지인 소년 챔프를 20년 동안 매주 빠지지 않고 사 볼 수가 있었다. 심지어 이 기간 중에 우리 집은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나빠지는 바람에 단칸방까지는 아니어도 매우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하기도 했다. 그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도 부모님은 내가 만화책을 한 권도 버리지 않겠다는 결정에 별다른 내색없이 공간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애쓰셨다. 물론 프라모델도, 그 무렵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정리하긴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는 비록, 구석자리에서 천장 높이까지 쌓아놓을 수 밖에 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만화책을 비롯한 수집품들을 버리지 않고 다음 이사 때까지 무사히 가져갈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기간에도 만화책은 매 주 사주시기까지 하셨고 말이다. 공간적인 면에서 나만의 공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었지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내 세계를 존중받고 있었고, 내 세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유지할 의지가 있느냐였다. 내가 별이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별이가 좋아하는 것은, 부모의 호오와 상관없이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것.

 

2021년 10월 창동 집에서. 마인 크래프트와 상관없는 것도 마인크래프트화 시킨다. 찐팬 인정.

현재 별이가 가장 좋아하는 컨텐츠는 마인크래프트다. 게임부터 레고, 그리고 유치원에서 그리는 그림까지 마인크래프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일 듯. 그 중에서 별이가 나름의 세계로 만들어서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레고 마인크래프트(이하 마크).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소유권 및 관리는 전적으로 별이의 몫이다. 마나님과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샀지만 별이에게 무려 댓가없이 주는 대인배들!! 사실 아직까지는 겨우 별이에게 네가 이것들의 주인이라는 걸 알려주는 수준에서 머물기는 하지만...;; 아무튼 별이의 세계에 대한 결정권은 별이에게라는 모토 아래서, 마나님과 나는 별이가 만든 세계를 우리의 임의로 분해하거나 부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보니 부수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직 집이 충분히 넓지 못해서 아이의 놀이 공간은 여전히 거실이기 때문이다. 이전 집보다 조금 더 커지기는 했지만, 아빠의 작업방 때문에 별도의 놀이방이 없는 관계로 별이의 세계는 거실이 주무대다. 넓디 넓은 거실에서 별이는 내키는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는 하는데, 그 세계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 이번에는 베란다로 자리를 옮겨서 그곳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별이에게는 레고 뿐만 아니라 핫토이라는 자동차 세계도 있기 때문에 두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은 전혀 어려운 미션이 아니다. 덕분에 집을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로 만들어두고 싶어하는 마나님의 스트레스 지수는 줄어들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 중...^^;;;

 

2020년 7월 창동 집에서. 원래부터 별이의 놀이 공간은 거실이긴 했다.

덕분에 별이의 세계는 꽤나 오랫동안 제멋대로 방치(?)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엄빠의 임의 조치로 별이의 세계를 정리하는 것은 피해야한다는 명제를 지키면서 거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별이에게 어서 치우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열심히 설득하고 함께 치우면서 은근슬쩍 레고 마크를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두면 어떠냐고 묻는데, 아직까지 별이는 허락하지 않고 있다. 허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위의 게임 사진에서처럼) 거실 한쪽 구석에 걸리적거리지 않는 정도로 밀어두는 정도가 전부. 별이가 스스로 저 세계를 분해해서 다른 세계로 만들겠다고 하기 전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 저 레고 마크 월드는 별이의 놀이 배경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2020년 5월 창동 집에서. 되도록 다양하고 많은 세계를 접하게 해주고 싶다.

아이의 세계가 존중받는 것은 요즘은 어느정도 당연한 것으로 잡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결심이 유별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어쩌면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 나중에 별이가 존중받고 있다는 경험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비록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으로 별이의 세계를 원하는 만큼 무한정 늘려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별이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 앞으로 별이가 만들어나갈 세상이 참 궁금하다.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네가 만드는 세계를 지지하고 응원한단다.

 

2021년 9월. 창동 집에서. 별이가 만든 레고 마인크레프트 크리처들과 함께.

일단 지금은 마인크래프트라는 것은 내가 아주 자알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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