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in NeverLand
자아성찰 #3 - 창조자의 꿈 본문
영상물을 잘 보는 편은 아니다.
요즘은 퇴근하면서 매일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지만, 원래 나는 드라마가 되었건, 예능프로가 되었건, 뉴스가 되었건 간에 영상물을 먼저 찾아서 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짧은 인터넷 영상이든, 유튜브든 영상물은 나에게 1차 선택지에서 벗어나있다. 물론 회사에서 잠깐 여유를 가질 때는 예외지만.^^; 이렇게 영상물을 기피하는 이유는 영상물을 보는 경우에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하는데, 그 순간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시간이 뭔가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능 정도는 그냥 소리만 들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최근 예능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자막을 통한 웃음코드가 있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아예 안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니, 화면을 켜는 순간 나는 분명히 그 화면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대신 라디오나 팟캐스트는 자주 듣는다. 내가 과거의 미디어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낭만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 편이 내가 가진 시간을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인 듯.
이렇게 영상물을 멀리하는 시간은 대부분 내 취미 생활로 채워진다. 그리고 내 취미 생활은 주로 손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중학생 무렵에 나는 만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라디오를 틀어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던 기억이 있다.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긴 했는데,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손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 무렵에는 영상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 그리고 중학생 때까지는 프라모델을 계속 만들어왔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에도 만들었던가? 확실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전에 만들어두었던 프라모델들은 계속해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사람에 대한 개념이 너무 고지식하게 자리잡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렇게 손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가장 의미있었다. 만들어낸 것의 수준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아무튼 뭔가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는 것은 그것이 실용적이건 아니건 간에 내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다.
아무튼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계속해서 만화 그리는 것에 빠져있던 내가 막상 대학생이 되어서 선택한 동아리는 영화 동아리였다. 나는 영화에 매우 푹 빠졌었고, 그 기간은 그 이전에 내가 즐겨왔던 그림과 프라모델을 거의 하지 않은 기간이다. 영화를 틀어놓은 채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영화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기 위해 매우 몰두하고 집중했다. 이게 습관아닌 습관처럼 몸에 베어서 지금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관람할 때 꽤나 몰입해서 보고, 그만큼 에너지 소모도 크다.;; 그런데 영화는 손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림도, 프라모델도 주로 혼자서 내키는대로 해왔던 나에게 영화를 찍거나 하는 것은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영화 소품을 만들거나 하는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았겠지만, 당시 우리 동아리는 그런 특별한 소품을 필요로 하는 영화 제작을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영화와 관련해서 직접 뭔가를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게 있어서 그 부분은 기록이었다. 영화를 보고 내 생각을 적는 것. 대학생 때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다이어리부터 시작해서, 여기 블로그까지, 나는 내가 본 영화와 애니메이션, 시리즈물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를 쓰는 것은 온전히 그 작업에만 매달려야 하는 일이라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 중에서 가장 효율이 떨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그림과 프라모델에서 멀어지면서 손으로 하는 일에서 멀어졌던 내가 다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한 건 취업 준비를 하면서부터다. 알바로 생긴 돈으로 레고를 사서 만들다가 취업 후에는 다시 본격적으로 프라모델을 시작했다. 즐겨듣는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프라모델을 다듬고 색칠하고, 그렇게 하나씩 무언가를 완성해나가기 시작했다. 퀄리티가 높지 않고, 만드는 도중에 귀찮음과 실력 부족으로 여기저기 허술한 부분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완성하고 났을 때 드는 감정이 매우 좋다.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높은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만들어서 내 나름의 완성품을 내놓는 것 자체가 즐겁다. 연애를 하거나 아이의 성장을 보는 것처럼 벅차오르거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근한 성취감과 뿌듯함이 좋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프라모델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면서, 차라리 이렇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더 즐겁다면서 말이다. 잠시 생각하던 내가 술기운을 빌려서 했던 대답은, "나는 아마 신이 되고 싶은 것 같아요."였다. 그림을 통해 내가 얻고 싶었던 것도, 프라모델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었던 것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즐거움도 저 대답 속에서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영화 등의 리뷰를 쓸 때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느꼈던 무언가 아쉬웠던 점까지도 말이다. 나는 내 세계를 만들어 갖고 싶다. 아무도 모르고, 나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의미가 없겠지만, 그저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부탁하지 않고, 내가 지금 이 일을 그냥 포기해버려도 이 세상에는 전혀 상관없지만 계속해서 나는 내 세계를 만들고 확장하고 싶다. 그렇게 확장되는 세계가 즐겁고, 그 즐거움이 좋다.
지금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지만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읽었던 별자리 성격 해설에서 읽었던 말이 있다.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향해서 느리지만 꾸준하고 묵묵히 전진하는 유형'
이 해설이 내 별자리 때문은 아니고, 나와 다른 별자리의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되는 말이지만, 아무튼 저 해설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중간중간 단절은 있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 나의 세상을. 이 세상은 내가 가진 외부적 조건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나 자신과만 연결된 세상이다. 그 세상이 언제 끝날 지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유한한 존재이니, 내가 만드는 세상도 유한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그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 세상에서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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